Kuta Beach Surfing, 인도네시아 발리
어느 틈엔가 한국에서 서핑 붐이 일었다. 제주뿐만 아니라 강원도 양양 같은 곳이 서핑의 명소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서핑이라니! 스키와 같은 야외 스포츠도 좋아하지 않고 바닷가를 놀러가도 뒷처리가 귀찮아서 바닷물에 몸을 담그는 건 절대로 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그래도 서핑은 뭔가 끌리는 데가 있었다. 서핑하는 모습에서 느껴지는 청량감을 한번쯤은 경험해보고 싶었달까.
그래서 발리를 여행지로 정한 데에도 서핑을 제대로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발리는 한국인들에게는 고급 신혼 여행지 외국인들에게는 서핑 여행지로 유명했다. 그러나 단순 휴양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나는 2주에 이르는 일정을 계획했고, 웬만한 사람이 발리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액티비티를 포함시켰다. 우붓에서의 요가 수업-줄리아 로버츠가 주연으로 등장했던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2010)에 나오는 발리는 주로 우붓에서 촬영되었다-과 요리 수업, 발리 북부에 위치한 화산에서의 일출 트레킹, 아융강에서의 래프팅까지. 물론 멋진 휴양 리조트를 예약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도 어쨌든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서핑이었다.
늘 여행 준비가 철저했던 나는 여행 출발 일주일 전 강원도 양양으로 일종의 사전 훈련을 떠났다. 주말 동안 1박을 하며 서핑을 미리 체험했다. 4월의 강원도 바다는 아직 물이 차 전신 웻수트를 입었다. 역시 서핑은 쉽지 않았다. 테이크오프-파도를 타기 시작하면서 몸을 일으키는 동작-의 타이밍을 맞추기 어려웠고, 패들링-팔로 물을 저어 나가는 동작-은 생각보다 많은 체력을 요구했다. 야외 스포츠이다보니 내 실력과 상관없이 그날 그날의 날씨도 중요했다. 그 주말은 바람이 너무 없어 파도가 약했고, 보드를 잘 다룰 줄도 모르는 초심자에게는 더욱 어려운 환경이었다.
과연 발리에서 서핑은 괜찮을까?
발리 서핑의 성지 꾸따 해변에 위치한 바루서프Burasurf School는 한국인 모두가 간다는 유명한 곳이었다. 한국인이 운영하고 있었고, 짧은 한국어를 할 줄 아는 현지 강사가 수업을 진행했다. 나와 남자친구는 1명의 강사가 4명을 가르쳐주는 그룹 수업을 4일 신청했다. 수업은 물 때에 맞춰 하루 두 번-새벽과 늦은 오후-에 두 시간 정도 진행하는 방식이었다.
고급 휴양지인 누사 두아Nusa Dua 지역의 리조트에서 호사를 즐기던 나와 남자친구는 하루 전날 꾸따 비치로 이동했다. 첫번째 수업을 들으러 아침 일찍 일어날 생각을 하며 긴장 속에 잠을 청했다.
The Bene Hotel, Kuta
4일짜리 서핑스쿨을 등록하며 바루서프 바로 뒷편 골목에 있던 저렴한 숙소에서 5박을 했다. 1박에 조식 포함 5만원 수준이었다. 그런데 중정의 수영장도 생각보다 별로이고 객실 화장실에서 하수구 냄새가 내내 올라와 좀 후회했었다.
돈 더 벌어서 다음에 올 때는 해변가 대로변에 있던, 초록의 외벽 장식이 멋진 The Stones Hotel Legian에 머물러야지 다짐했었다.
해도 제대로 안 뜬 새벽. 약간 늦잠을 잔 탓에 우리는 래쉬가드를 후다닥 챙겨입고 워터슈즈만을 신은 채 좁은 골목길을 내달렸다. 길에는 쥐시체가 나뒹굴고 있었고, 얇은 워터슈즈 너머로 돌멩이가 채였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새벽마다, 오후마다 하루에 두번씩 내달리던 숙소 앞 골목길.
붉은벽 너머엔 사원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안쪽으로 포켓몬이 많이 출몰했다. 한창 포켓몬고를 열심히 하던 나는 오며 가며 저 벽에 달라붙어 있곤 했다.
안전교육과 해변에서의 간단한 동작 교육 후 바로 바다로 나갔다. 파도를 타기 시작하는 라인업까지, 더이상 모래 바닥이 발에 안 닿기 시작하면 얄짤없이 패들링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그러다보니 파도를 타기도 전에 이미 체력을 꽤나 써야 했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가 등뒤로 몰려왔고 강사가 한 명씩 롱보드를 뒤에서 밀어주며 "일어나!!"를 외쳤다. 어느 새 어깨까지 흰 파도가 굉음을 내며 들이닥치면 쫓기듯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여지없이 '통돌이'-정식 명칭은 와이프아웃wipe-out인데, 테이크오프를 하다 파도에 휩쓸리는 것을 말한다-를 당했다. 롱보드의 핀에 머리를 맞으면 큰 부상을 입을 수도 있기 때문에 머리를 팔로 감싸쥔 채로 바닷물 속에서 세탁기 속 빨랫감처럼 정신없이 굴렀다.
빠지고
또 빠지고
여기 사람이 빠져있어요
그렇게 파도와 사투를 벌이며 새벽 수업을 듣고 돌아오면 그제야 조식을 먹고(이 고강도 운동을 빈속에 하다니, 이게 웬 다이어트란 말인가) 그대로 침대에 지쳐 쓰려져 죽음과도 같은 잠에 빠져들었다. 정오를 훌쩍 넘겨 다시 일어나 남자친구와 얘기를 하는데 오늘 아침을 자연스럽게 ‘어제’라고 말하고 있었다. 늦게서야 이걸 깨닫고 어이가 없어 둘다 한참을 웃었다. 정말이지 하루가 이틀 같았다.
이틀차 수업도 엄청난 체력전이었다. 라인업까지 간신히 나아가서 파도를 기다리는데, 먼 바다에서부터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다. 엄청난 기세로 하얗게 부서지며 몰려오는 파도를 롱보드에 누운 상태로 고개를 뒤로 돌려 보는데 어쩐지 진시황릉의 병마용이 머릿 속에 퍼뜩 떠올랐다.
아 이대로 죽는 걸까.
한낱 미물에 불과한 내가 감히 위대한 대자연의 힘을 거슬러 저 파도를 올라타려는 게 건방지게 짝이 없는 시도로 느껴졌다. 이대로 파도에 휩쓸리면 그것이 당연지사다...나는 기묘한 체념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또 열심히 파도에 나가떨어져 바닷물을 실컷 마셨다.
3일차 새벽 수업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왔는데, 도저히 내일까지 서핑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체력이 바닥을 치고 있었고 몸이 만신창이였다. 맨손으로 롱보드에 오르락 내리락 하다보니 손바닥이 까져 쓰라렸고 멍은 예사였다. 이틀차에 약간 삔 새끼손가락도 계속 신경이 쓰였다. 무엇보다 실력이 쉬이 늘지를 않고 매번 통돌이를 당하고 있자니 분하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했다.
한참을 남자친구와 고민을 하며 토론한 끝에 결국 서핑 일정을 하루 줄이기로 했다. 늘 체력을 끝까지 쓰며 노는 일에조차 열과 성을 다하는 나에게는 그또한 불편한 결정이었지만 인간적으로 힘들어도 너무 힘들었다.
스쿨에 문의를 해보니 알겠다면서 하루치 수업료도 돌려주었다. 그렇게 가벼워진 마음으로 3일차 오후 수업을 받았다. 세상일이 어찌나 야속한지, 이 여섯번째 수업에서 보드가 잘 타지더랬다. 보드에서 나가떨어지는 횟수가 훨씬 줄어들었고, 보드를 탄 채 해변가까지 무사히 들어올 수 있었다. 파도가 나를 밀어주면 몸이 물 위로 붕 떴다. 중력의 끌어당김을 벗어나 몸이 떠오르는 느낌은 자유로운 쾌감을 선사했다. 기분이 좋았다. 잠시 그냥 내일도 보드를 탄다고 다시 말해볼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지만 이미 결정을 바꾸기엔 너무 늦었었다.
그렇게 마지막 수업을 끝내고나니 마음에 여유가 생겨 해변에 앉아 있을 생각이 들었다. 그전 이틀은 수업이 끝나면 체력이 고갈되어 보드를 이고지고 돌아가기에 바빴었다. 지친 상태로 롱보드 위에 주저앉아 지는 해를 보고 있자니 그렇게 세상이 평화롭고 아름다울 수 없었다. 왜 진작에 노을을 보고 갈 생각을 안했을까 아쉬웠다.
Kuta Beach, Kuta
이 풍경이 아름다웠던 건 내일이면 서핑 지옥에서 해방된다는 안도감이 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원래 2020년에는 발리로 두번째 서핑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4일을 계획하고 간 일정을 3일만에 관두었던 게 못내 아쉽기도 했고, 무엇보다 더 나이를 먹으면 절대 다시 시도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위기감이 컸다. 자꾸만 여기저기 아픈데가 늘어나니 더욱 그랬다.
그러나 코로나 때문에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부디 내 용기와 체력이 더 사그러들기 전에 다시 꾸따 비치의 골목을 또 내달리며 하루가 이틀이 되는 기적같은 시간이 돌아오기를 오늘도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