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또 그리고 향수

프랑스 그라스

by 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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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V from Paris Gare Lyon to Nice Ville

파리에서 남프랑스로 이동하던 기차의 유리창에 써져 있던 문구. '전망이 있는 좌석'이라는 뜻이다.


남프랑스 여행의 시작은 이랬다. 남미 여행 상품을 둘러보던 여행사 사이트에 ‘남프랑스 자전거 여행’이라는 상품이 있더랬다. 하루에 몇십 키로씩 자전거를 타고 남프랑스의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며 하는 여행. 짐은 차로 계속 옮겨주고, 고성에서의 숙박이 포함된 구성이었다. 자전거를 타길 좋아하는 나에게는 무척 매력적인 구성이었다. 엄마도 자전거를 타길 좋아하니, 엄마랑 가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엄마도 마음에 들어했다. 여기에 엄마가 이모와 셋이 함께 떠나는 것을 제안했다. 엄마는 자신의 퇴직을 두고 그간 일하는 엄마를 많이 도와주었던 이모에게도 좋은 시간을 선사하고 싶어했다. 전혀 문제될 게 없었다.

계획을 세우며 몇가지 작은 목표를 세웠다.

그라스를 꼭 가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남프랑스를 대표하는 풍경인 라벤더가 한창 흐드러지게 피는 8월을 포기하고 5월에 여행을 떠나는데, 이거라도 꼭! 같은 느낌이었달까. 그라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향수 마을. 소설과 영화 <향수>의 배경이 된 곳. 냄새에 굉장히 예민한 나는 종종 '공부가 아니었다면 난 조향사가 되었을지도 몰라'라는 농담을 하곤 했다. 그 얼토당토 않은, 가지 않은 길에 대해 미묘하고도 아련한 감정이 항상 있었기에 그라스는 꼭 한 번 직접 방문해보고 싶었다. 늘 새로운 경험에 목말라 있는 나는 그라스에서만 체험할 수 있는 3대 퍼퓨머리의 향수 워크샵도 해보고 싶었다.

'샤또' 고성에서 숙박 계획했다. 이것은 처음에 남프랑스를 마음 먹게된 여행 상품의 흔적이었다. 아니면 언젠가 읽었던 어느 블로그의 감성 돋는 남프랑스 고성에서의 숙박 후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비록 블로그에서 극찬하던 그 고성이 어디인지 알아내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나는 다른 숙소를 열심히 찾았다. 엄마는 내 원대한 계획을 듣더니 터키 카파도키아에서 숙박했던 동굴 호텔을 떠올리며 싫어싫어를 외쳤지만, 난 타협해줄 생각이 별로 없었으므로 가뿐히 그녀의 외침을 흘려들었다.




여행은 파리에서 시작해 떼제베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 니스에서부터 본격적인 남프랑스 일정이 시작되었다. 니스에서 다시 2박을 한 뒤 우리는 렌트카를 빌렸다. 그라스에 도착해서 한 첫번째 일은 숙소에 먼저 들러 체크인을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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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berge du Vieux Chateau, Cabri, France

카브리Cabri는 그라스 시내에서 차로 15분 정도 떨어진, 그라스보다도 더 작은 동네이다. 여기에 위치한 '샤또' 숙소는 이 여행의 소주제 하나였던 '고성에서 숙박하기'를 위한 코스였다. 나중에 보니 고성이라기 보다는 예쁜 시골 민박에 가깝긴 했다('Auberge'라는 단어 자체가 민박이라는 뜻이었다).

객실이 너무 아기자기해서 막 신혼부부여야 할 거 같고 그렇더라.


숙소는 정말 사랑스럽고 아름다웠다. 비록 카브리 마을까지 올라가는 길의 경사가 가파르고 좁아 운전하는 엄마를 다소 고통스럽게 했지만 그런 엄마조차 숙소의 매력에 감탄했다. 이모도 그 아기자기함이 흠뻑 빠졌다. 모든 게 동화같은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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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 마당의 담벼락에는 라일락 같은 꽃이 연보라색을 뽐내며 멋드러지게 피어있었다.


짐을 푼 우리는 다시 그라스로 이동해 3대 퍼퓨머리 중 하나인 갈리마르에서 조향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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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Organ of Flavours in Grasse

그라스 3대 퍼퓨머리 중 하나인 Galimard에서 진행하는 조향 체험 프로그램. 90분 동안 수십 개의 원료의 향을 직접 맡아가며 자신만의 방향제Home Fragrance를 만드는 프로그램이다.


이모와 둘이서 탑노트, 미들노트, 베이스노트에 어울릴 향을 골라가며 꼼꼼하게 향수를 만들어보았다. 샵에는 한국인 직원이 있어 우리 둘을 살뜰히도 도와주었다. 사실 이모는 향수를 무척 좋아하는 편이다. 그라스를 고집해 일정에 넣은 나로서는 무척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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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의 결과물. 'Tranquilite d'esprit'-마음의 평화라는 이름도 직접 붙였다. 그만큼 마음을 진정시키는 편안한 향이었다.




다음 날 아침 조식을 먹으러 숙소 레스토랑으로 내려갔다. 전날 같은 곳에서 먹었던 저녁도 무척 훌륭해 우리를 정말 행복하게 했었는데, 조식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신선한 오렌지 주스에 따끈하게 구워낸 빵. 과육이 씹히는 오렌지 마멀레이드에 따뜻한 커피까지. 여기에 아침햇살까지 끼얹어졌다. 이보다 더 완벽한 순간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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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바구니로 비쳐오는 아침햇살이 찬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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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토랑 내부. 흰 벽과 나무의자, 흰 테이블보가 신선한 아침 공기에 반짝였다.


아쉽고 또 아쉬웠지만 숙소를 체크아웃하고 다시 그라스 시내로 나섰다. 이 날은 다른 유명 퍼퓨머리인 Molinard와 Fragonard에 들리기로 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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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fumerie Molinard - Bastide historique & Musée, Grasse

들어가는 길의 보랏빛 현수막이 눈을 사로잡았다.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 지점은 샵뿐만 아니라 향수와 Molinard 브랜드의 역사를 소개하는 전시실을 갖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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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linard는 Lavande가 제일 대표적인 상품이지만, 우리는 Rose가 더 마음에 들어 각자 두세병씩 물건을 샀다.


Molinard에서 생각보다도 많은 시간을 보냈다. 엄마와 이모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을 하며 향수를 여러 병 '쓸어담았'다. 나는 나머지 퍼퓨머리인 Fragonard는 언제 가나 싶으면서도 둘이 정신을 팔 정도로 즐기는 걸 보니 더없이 뿌듯했다.


간신히 Molinard를 나와 Fragonard로 향했다. Molinard도 예쁜 것 투성이었지만 Fragonard는 더 화려하고 더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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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키지는 Fragonard를 따라올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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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구니에 아름다움이 타고 있어요.


엄마와 이모는 또 정신없이 향수며 비누며 온갖 물건을 쓸어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바구니에 아름다움을 잔뜩 담은 채 가게를 종횡무진 누비는데 그 표정이 어느때보다도 편해보였다. 100유로 이상 구매 시 재활용 가방을 주는 행사를 하고 있다는 걸 내 도움도 없이 찰떡같이 알아오더니 물건을 더 사야겠다며 다시 가게를 뛰어다녔다. 사람이 행복하면 막 안들리던 외국어도 잘 들리고 그런건가 싶었다.


잠깐 소나기가 내리더니 또 거짓말 같이 비가 그쳤다. 햇빛이 찬란했다. 엄마와 이모는 개선장군 같이 위풍당당하게 Fragonard의 쇼핑백을 하나씩 옆구리에 끼고 가게를 나섰다. 잔뜩 신이 난 두 아주머니의 기세에 나는 웃음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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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색 우산이 줄맞춰 걸려있던 그라스 시내의 골목길.


그라스 시내 자체는 사람들이 말한 것만큼 그렇게 예쁘지 않았다. 그렇지만 퍼퓨머리의 공간과 그 분위기, 디자인이 주는 아름다움이 순수하게 기쁘고 즐거웠다. 향수의 마을 그라스에서 세상의 아름다움을 더없이 만끽한 느낌이었다.




이모는 지금까지 간 곳 중에서 어디가 제일 좋았어? 어디를 다시 가고 싶어?
여전히 그라스가 기억이 제일 남아. 너무 아름다웠고, 숙소도 너무 예뻤고, 향수도 좋았고.


2주가 넘는 긴 일정동안 파리에서 시작에 남프랑스의 다양한 장소를 거쳐 스페인 바르셀로나까지 여행을 했어도, 이모는 여전히 그라스를 제일 기억에 남는 여행지로 손꼽았다.


여행을 떠나기 전 나는 답지 않게도 여행에 약간의 회의감을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언제부턴가 목적지에 대한 설렘보다는 출발지로부터의 탈출에 대한 마음이 너무 커 그만큼 일상의 고단함이 주는 무게가 느껴졌고, 여행지에서 체력이 부치거나 몇몇 일들이 뜻대로 잘 풀리지 않으면서 그런 마음이 더욱 들었던 것 같다.


그런 복잡한 마음을 한 구석에 품고서는 떠난 여행이었다. 그래서 더 간절히 바랬다. 아주 오래 생각하고 또 오래 계획했던 여행이니 만큼 이 여행은 부디 즐거운 기억을 많이 만들 수 있기를. 무엇보다도 엄마랑 이모와 함께하는 시간을 스스로 소중히 여길 수 있기를 바랬다.


다행히 세 사람 모두에게 이 여행은 특별한 순간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래서 깨달았다. 세상의 지극한 아름다움을 만난 것 자체도 황홀한 일이었지만, 내가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다는 만족감이 있었다. 아무리 얘기해도 질리지 않을 기억, 마음 속에 영원히 남을 행복감을 내 손으로 만들었다는 충만감. 나는 행복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나의 '힘'을 확인한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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