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만큼 보편적인 주제가 없겠지만서도, 그만큼이나 모두가 해결하지 못한 주제도 없을 거다. 모두가 열성적으로 해답을 찾아 헤매지만 안타깝게도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 영역이라 더 그렇다. 더군다나 이 관계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개 비이성적인 상태에 놓여 있는 경우가 태반이니 더욱 어려운 일이다.
방어기제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해라
- 윤홍균, <사랑이 오래가는 비밀: 상대방의 방어기제를 파악하라>
흔한 연애담이 그렇듯 '이래도 되나 안되나 되려나' 같은 아슬아슬한 설렘으로 시작한 나의 연애는 곧 거친 갈등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누군가와 함께 할 수 있는지는 그 사람의 방어기제를 내가 수용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한다. 곧, 그 사람의 좋은 모습이 아니라 나쁜 모습을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판단해야 한다. 잘 맞는 장점을 보고 만나는 게 아니라 잘 안맞는 단점이 내가 허용 가능한 형태와 수준인지가 중요하다는 관계 진리의 정신의학적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과연 그의 방어기제를 수용할 수 있었던 걸까? 남자친구와의 갈등은 일차적으로 그의 메마른 세계관과 거친 표현 방식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도무지 그가 인지하고 있던 세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 그때까지의 내 삶이 그의 표현대로 상당히 순진했나보다. 세상에는 참 더러운 모서리가 구석구석 많았고, 남자친구의 입에서 기어코 '네가 그런 걸 모르고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게 나는 부럽기까지 하다'라는 애끓는 성토가 나오곤 했다. 더군다나 그 세계는 매우 날 것의 형태로 내게 무참히 던져졌다. 귀가 아프고 머리가 어지럽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일일드라마에서 뒷목을 잡고 쓰러지는 장면을 보면서 늘 웃기다고 생각했는데, 아 정말 사람이 그럴 수 있겠다-그러고 싶다, 차라리 지금 기절해버렸으면-싶었다.
정말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그는 자신이 공격받는다고 생각하면 상대방을 해치는 말을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는 걸 깨달을 때였다. 이렇게 사람이 동물적이어도 되나? 네게 인간의 우아함을 지키려 뼈를 깎는 인내심을 발휘하는 건 우선순위에 없구나. 혹은 그 정도 마음의 여유를 가질만큼 너는 성숙하지 않구나.
이것이 뼈저린 고통이었던 것은, 내가 만나는 사람의 수준이-곧 내 수준이-이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절망감 때문이었다.
또다른 괴로움은 그의 배타성이었다. 그는 자신이 경험한 적 없는 일이나 자신의 기존 논리에 납득되지 않는 일에 그다지 수용성을 발휘하지 않았다. 모든 낯선 것은 그에게 경계의 대상이었다. 때문에 새로운 모험을 벌이는 데에 삶의 희열을 느끼는 나는 늘 그를 불안하게 했다. 그로 인한 갈등이 반복되자, 나는 소소한 계획조차 그에게 말하기를 주저하게 되었다. 싸움이 무서워 별 것 아닌 일조차 가장 가까운 사람과 즐겁게 떠들지 못한다는 그 자체가 스트레스였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나서 그가 왜 그렇게 굴었는지 '이해'할 수는 있었다. 과거의 경험으로 인해 그는 관계 불안이 큰 사람이었고, 마치 상처입은 작은 동물이 날카로운 울음소리로 자신을 보호하려 과장하듯, 그는 스스로를 보호하는 게 너무도 절박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내가 상처받았으니 너를 상처입혀도 괜찮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었어야 했다.
우리의 본질은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누군가와 함께하게 되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렇게 서로를 통해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곤 한다. 그리고 이 변화는 불가역적이어서, 설사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되더라도 변해버린 새로운 모습으로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다. 그래서 한 번 한 번의 관계에서 무엇을 남기는지 또 무엇이 남겨졌는지가 중요하다. 마치 나무의 나이테처럼 모든 건 굴곡을 남기기 마련이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그의 상처는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내가 오롯이 책임질 일은 아니었다.
"인간은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사랑을 실감할 수 있네."
- 고가 후미타케, 기시미 이치로 <미움받을 용기>
사랑의 비극이 우리로 하여금 '자유'의 문제를 숙고하게 한다
- 강신주, <철학이 필요한 시간> 중 <자유와 사랑의 이율배반-사르트르, 존재와 무>
그 갈등이 너무도 고통스러웠던 것은, 그것이 단순히 연인 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실존과 이어지는 문제이기 때문이었다. 그를 좋아하는 지점보다 그를 견디지 못하는 지점은 곧 나의 본질을 더욱 선명히 밝혔다. 내 본질로의 투쟁은 때때로 '넌 너무 고집이 세'라는 비난으로 돌아왔지만, 나는 그저 어떻게든 나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뿐이었다.
서글프다고 생각했던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여전히 그의 이해를 갈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를 도무지 이해해주지도 인정해주지도 않는 그에게 나는 그 누구보다도 나로서 존재하고 싶었다.
사랑에서 우리는 다른 것에 끌리고 같은 것을 갈망한다
사랑은 좋은 이야기와 비슷하지 않을까? 나와는 다른 타인의 이야기에서 의외의 같음을 발견하면서 오는 공감과 카타르시스가 있듯, 우리는 사랑에 대해서도 이율배반적인 욕망을 가진다. 다른 모습에 끌렸지만 어느 지점에 이르면 상대방이 나와 같기를 원한다. 그것이 이룰 수 없는 소망임을 어렴풋이 알면서도 말이다.
사실 우리가 서로 다른 사람인 것은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나의 틀을 깨는 사람을 무척 좋아해서 더욱 그랬다. 나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사고하는 남자친구가 나에게는 퍽이나 흥미로웠다. 이를테면 나는 전형적인 모범생이었고, 남자친구는 엉뚱한 상상력이 넘치는 개구쟁이에 가까웠다. 늘 고루한 스스로에게 불만이 있는터라, 어쩜 이 사람은 이렇게나 나와 다르게 세상을 표현할까 싶은 점이 그와의 시간을 즐겁게 했다.
그러나 역시 사랑하는 관계에서 서로 닮고 싶은 욕망을 이기기는 어렵다.
이걸 생각하면 늘 어느 소설가의 슬픈 단편을 떠올리게 된다. 소설 속 주인공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불구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모르는 그의 아내가 아이를 가졌다며 기뻐한다. 주인공은 갓 태어난 아기를 떠올리며 슬프게 읊조린다. 아기와 자신의 발가락이 닮았다며. 동질감이 이다지도 비극적일 수 있다니.
그러나 역시 닮는다는 것은 기쁨에 가까운 일임이 분명하다. 그것은 외롭고 황량한 세상에 홀로 던져지지 않았다는 따스함이다.
우리는 '귀가 닮았'다. 우리의 어린 시절을 수놓았던 명곡들을 함께 부른다. 밀레니엄을 빛낸 가요부터 더 어린 시절 우리의 저녁과 주말을 지배했던 애니메이션 주제곡까지, 우리의 정서에 아로이 새겨진 노래들은 함께 나누는 웃음으로 이어진다.
말도 닮아간다. 얼마나 그의 언어가 나의 언어와 비슷해졌는지 가끔 소름이 돋을 정도이다. 심지어 가장 자신을 지켜야 하는-그러니까 지지 않아야 하는!-갈등의 장면에서조차 이제는 나처럼 말하는 그를 본다(솔직히 좀 징그럽다).
생각 또한 닮아간다.
"이 가게 어떤 것 같아?"
"음...괜찮았어. 그런데 1시간 기다릴 정도는 아닌 것 같고, 딱 30분 정도까지는 기다리면 기분 좋게 먹을 수 있는?"
"나도 완전히 똑같은 생각을 했어!"
기나긴 시간과 복잡한 감정을 지나 결국 생각한 것은-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믿는다는 것이었다. 너를, 그리고 네가 주는 행복과 네가 줄지도 모르는 고통까지도. 그래서, 그 고통의 두려움에 지지 않고 현재의 행복에 집중하는 용기를 가지는 것. 그러기 위해서, 미숙한 욕심을 버리는 것. 네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거라고-어릴 적 읽던 동화처럼 '그래서 영원히 행복했답니다'와 같은 결말을 함부로 기대하지 않는 것. 그러기 위해서, 나를 잃지 않는 것. 설사 관계가 부서지더라도 그것을 각오하고 나의 감정과 생각에 솔직한 것.
애정하는 사람이니까, 그가 원하는 대로 맞춰주고 싶은 자연스러운 마음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어느 타인과 마주섰을 때보다 내가 나이기를 강렬히 욕망한다. 가장 보드라운 속살로 맞닿는 관계에서 내가 내가 아닌 것은 어쩐지 허무하다. 그래서 누군가 내 연애관을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내가 나일 수 있는 사람'이라고 답할 것이다. 이 문장이 나에게 얼마나 간절하고도 절박한 문장인지, 그가 알기를 소망하면서 말이다.
이러니저러니 모든 뇌세포를 총동원해서 똑똑한 척 해봐도, 결국에는 모르겠다는 기분이다. 평생을 고민해도 어차피 나는 그 실체를 알 수 없을 것이고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이 감정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이 감정에 백프로 설명되는 게 있겠나 싶다. 무 자르듯 명확한 사실을 증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있고, 그것에 엄격한 논리나 도덕적 기준은 통하지 않아 보인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명확하게 정의내릴 수 없고, 일정 부분은-아니 어쩌면 꽤 많은 부분은-그런 모호한 경계 속에서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른 채, 그것을 끌어 안고 살아가는 것이지 싶다. 알고 싶지만, 더이상 그 해답으로는 나아가지 못한 채.
뭐든 어때, 지금의 내가 너를 좋아하는 걸.
함께 갔던 가게 중 맛있게 먹은 곳을 얘기해보라고 했더니 사건사고가 있었던 가게만 얘기하는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너.
어항 속 금붕어에게 먹이는 어떻게 주는 거냐며 금붕어가 굶어서 아프면 어쩌냐고 소소한 것에 걱정하는 아이 같이 귀여운 너.
너무도 사랑스러운, 너의 작은 순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