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교육의 훌륭한 구성원으로 대치동 학원가를 성실히 누비던 때가 있었다-말은 이렇게 해도, 다른 아이들에 비해 그렇게 학원을 많이 다닌 것 같지는 않다. 나는 학교에서 학원으로 바로 이동해서 자습을 하다가 적당히 혼자 저녁을 먹고 학원 수업을 듣고서 깜깜한 밤이 되어서야 귀가를 하곤 했다. 집에 들르기에는 시간도 애매하고 영 귀찮았기 때문이다.
그 시절 제일 자주 갔던 가게는 'ㅁ' 일식 프랜차이즈였다. 'ㅇ' 오므라이스 프랜차이즈를 더 좋아하긴 했지만 다소 거리가 있었고, 'ㅋ' 버거집은 가격이 부담스러운데다가 가게가 늘 붐볐다. 'ㅁ'은 가게가 한산해 식사를 하며 못다한 숙제를 끄적거릴 수 있었다. 주로 카레돈까스를 많이 시켜먹었다. 가끔 모밀이나 알밥을 시켜먹는 약간의 일탈도 부렸던 것 같다. 하여간에 못해도 일주일에 한 번은 같은 가게를 거의 비슷한 시간에 방문했는데, 하루는 식사를 마치고 계산을 하려니 아뿔싸! 지갑을 깜빡하고 학원에 두고온 걸 뒤늦게 깨달았다. 학원과 식당은 뛰어서 5분 거리여서 사정을 설명하고 지갑을 가져오면 되겠거니 싶었지만 참 황망한 일이었다. 더듬더듬하며 못 미더우면 내 짐을 두고 다녀오겠다고 하니, 주인 아저씨가 호탕하게 웃으며 "아니 내가 학생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걱정말고 다녀와!"라고 말했다. 그 순간, 등짝에 찬물이 확 끼얹어지는 느낌과 함께 '다시는 이 가게에 오지 않겠다'라는 문장이 마음에 서릿발처럼 솟아올랐다. 나는 숨차게 학원 건물을 뛰어다녀와 음식값을 지불했고, 그 뒤로 두 번 다시 그 가게를 가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무슨 까탈이었나 싶지만-더군다나 주인아저씨는 분명히 나에게 호의를 베푼 것인데-그 때는 아저씨가 나를 '알고' 있다는 게 몸서리치게 싫었다. 어두운 얼굴로 혼자 와서 초조하게 못다한 학원 숙제를 해대며 돈까스를 우물거리는 나를 누군가 특징적인 존재로 기억하고 있다는 게 너무도 끔찍했다. 누군가 나를 알은체하는 게, 그게 가능하도록 내가 부지불식간에 약간의 정보라도 흘리는 게 지독히도 싫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나는 심지어 사복을 싸서 다녔다. 위에 말한 것처럼 학교에서 학원으로 바로 이동하면 나는 제일 먼저 학원 화장실로 달려가 교복을 사복으로 갈아입었다. 교복을 통해 드러나는 학교에 대한 정보를, 누군지도 모를 사람들에게 알리기 싫다는 이상한 결벽증 때문이었다. 저녁 때 학원 수업이 시작되면 앞뒤좌우로 죄다 교복을 입은 내 또래들이 가득했지만, 어쨌든 나는 싫었다.
그 후로도 나는 몇번 방문한 가게에서 알은체를 당하면, 곧바로 발길을 끊는 일을 반복했다. 존재감 없는 존재로 남고 싶은데, 자꾸 존재가 생겨버리는 게 영 마뜩찮았다. 이런 마음은 20대 시절까지 쭉 이어졌다.
그래도 가게에서 알은체 당하는 건 양반이지, 살다보면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이 나에게 자꾸 존재를 부여하는 일이 왕왕 있었다. 그들은 나도 모르는 내 모습을 참 잘 찾아내고 그 모습에 상당한 확신을 가지기까지 했다. 제일 자주 들었던 말은 '너는 참 쎈 캐릭터같아'. 나를 겉으로만 아는 사람일수록 이런 말을 생각없이 던졌다. 안그래도 예민한 내 감수성은 이러한 오해 앞에 폭발했다. 나에 대해 무얼 안다고 그렇게 쉽게 판단하나 싶었다. 3차원의 내가 2차원의 나로 평평하게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쉽게 뱉은 그 말에는 내가 무슨을 생각을 하는 사람인지, 내가 얼마나 복잡한 유기체인지에 대한 고려는 없었다.
그런데 결벽이 심하던 내가 언제부터인가 조금씩 바뀌어갔다. 여전히 시시때때로 나에 대해 판단하는 말이 귀에 꽂히곤 했지만, 이전의 불쾌감은 이제는 흥미로움에 가까운 것이 되어갔다. '너는 너무 생각이 많아'. '너는 완급조절이 안돼'. 썩 기분 좋은 내용이 아니더라도 왜 저렇게 생각했을까 궁금하다는 생각이 더 먼저 들었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를 묻고 싶은 기분에 가까웠다-아니면, 마치 점집에라도 앉아있는 기분이랄까!
왜 이런 심경의 변화가 생긴걸까?
얼렁뚱땅 생각하면, 좋은 얘기든 나쁜 얘기든 제대로 된 얘기든 아니든 누군가 나한테 관심을 가지고 조금이라도 생각을 했다는 게 신기하고 좋은가보다 싶기도 하다. 이렇게 바쁜 세상에 타인에게 한 줌이라도 관심을 기울이다니-더군다나 내가 그럴만한 대상씩이나 되다니-그것 참 대단한 일이다 싶다(비꼬는 것같지만 전혀 아니다). 아니면 늘 타인을 이해하고자 부단하게 노력하는 스스로를 떠올리며, 타인도 그저 나와 같은 시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겪는 것뿐이라고 생각하면, 오해조차도 너그롭게 받아들일 수 있다.
한편으로는 타인의 예상치 못한 예언에 쉬이 흔들리지 않는 나를 발견한다. 알은체 당하는게 지독히도 싫고 오해받는 게 불쾌했던 건 어쩌면 그 모습대로 그 말대로 내가 정해지면 어쩌나, 더 나아가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이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점차 한 칸씩 스스로를 쌓아나갔고, 그 확신은 한 두 번 스쳐만나는 타인의 말로 와르르 무너지진 않았다. 내가 불안하지 않으니 이 모든 작은 소란은 그저 흥미로운 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치 지나가며 확인하는 오늘의 운세처럼 말이다.
이제는 나를 쎈 캐릭터로 쉽게 판단하던 무심한 타인들도 이해가 간다. 여전히 오해라고는 생각하지만, 나의 어떤 모습을 보고 그런 얘기를 하는지, 이제는 좀 더 이해할 수 있다. 무언가 집중하기 시작하면, 말을 상당히 직선적으로 하는 편이니까 그렇게 생각하겠지. 일을 할 때는 어느정도는 격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런 식으로 말하니 그렇게 보이겠지. 납득할 수 있는 이유는 항상 내게 있었다.
나를 단골로 대하며 알은체하는 가게에 두 번 다시 방문하지 않겠다는 결심 또한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엉겹결에 내 존재가 부여된 걸 느낄 때, 끔찍히도 싫은 기분으로 가게로 뛰어 돌아가던 어린 나를 웃어 넘기며, 타인에 의해 가볍게 생겨난 내 존재를 가볍게 받아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