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내 마음은 벌새의 날갯짓마냥 초단위로 붕붕 거리는데,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같은 일을 대하는 타인을 보면 그게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었다. 나는 왜 저렇게 초연하지 못한지 자책했다.
그래서 나는 그런 쿨한 친구들을 좋아라 사귀었다. 그 친구들은 몇 가지 특징이 있었는데, 일단 그들은 세상에 냉소적이었다. 현상에 대해 날선 의견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또 그들은 예리한 점쟁이였다. 그들은 나도 모르는 나를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진단해냈다. 너는 이래, 너는 저래. 왜 그랬어, 이랬어야지. 야, 그냥 관둬, 가망 없어. 한편 그들은 무심했다. 자신의 말에 대해, 그 말이 남기는 파장에 대해 두 번 생각하지 않았다. 간혹 그 쿨함은 일정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그들의 컨디션과 기분에 따라 약속은 무시로 파투났다.
그 무심함이 어른스럽다고 생각했다. 항상 쿨하고-이성적이고-싶었기 때문에, 내가 닮고 싶은 모습을 가진 친구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쿨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그래서 그들의 말과 태도에 상처받는 건, 내가 쿨하지 못하고 쓸데없이 예민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한 번 더 돌아보니, 그건 쿨한 게 아니었다. 그저 무례한 것이었다. 무례하다는 말이 의도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거라면, 그냥 그들도 어린 마음에 쿨해 보이고 싶었던 것이라고 하자. 세상에 무심한 척, 세상의 씁쓸함을 다 알고 있는 척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각자 벗어날 수 없는 유년 시절의 상처와 쉽게 떨칠 수 없는 취약점이 있지만, 안간힘을 써서 그것을 티내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일 뿐이었다. 끊임 없이 나는 괜찮아, 흔들리지 않아, 이건 아무 것도 아니야, 라고 스스로에 외치는 행위일 뿐이라던가.
그도 아니라면 무례함을 쿨함으로 착각한 건 사실 나일지도 모른다. 그저 외롭고 질투심 많은 마음의 서툰 표현이었을 뿐인데, 내가 멋대로 그것을 쿨하다고 해석해버렸는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밤하늘의 별처럼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행복의 방식이 존재한다고 믿지만, 한편으로는 그 모든 다양함의 밑에는 생각보다도 보편적인 정서가 존재하는 것 같다. 우리 모두 따뜻함이 필요하고, 우리 모두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받기를 갈망한다는.
그래서 그 모든 쿨함에 대한 착각과 쿨한 척에 대한 깨달음을 지나고나면, ‘그래, 내가 따뜻함을 주자, 내가 너그롭게 먼저 바라봐주자’라는 결심이 샘솟는다.
세상에는 테이커(taker)가 있고 기버(giver)가 있다고 생각한다. 남에게 요구하고 자기 것만 챙기는 게 익숙한 사람과, 남에게 주고 남을 돌아보는 게 더 익숙한 사람. 숙명적 기버인 나는 테이커를 마주칠 때면 내가 왕창 손해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기적인 테이커가 진짜 현명하게 사는 걸까 싶은 아찔함이 들 때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살지 않으려 한다. 기버가 그럴 수 있는 건 '멍청할' 힘이, '손해볼' 여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네게 주어도 나는 나를 챙길 수 있다. 너에게 줄만큼 나에게는 힘이 있다. 나에게는 넘치는 사랑과 에너지가 있다.
그것이 나의 힘이고 자기 증명이라고 믿는다.
무엇보다, 우리는 모두 불리는 대로의 존재가 되고 싶은 거스를 수 없는 욕구를 지니고 있다. 누군가 나를 착한 사람으로 봐주면 우리는 착한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되어야 한다고 자연스레 느낀다. 그러니 이기적인 테이커여도 이타적인 기버로서 그를 대하면 언젠가는 그도 더 따뜻하고 여유있는 기버가 되리라 믿는다.
그래서 이 세상이 테두리로 똑떨어진 도형이 아니라 물감처럼 번진 도형같은 사람이 더 많아지기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