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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 Aug 30. 2020

육체의 세계를 향하여

외로운 세상이다.

코로나가 닥치기 전에도, 이 세상은 제법 외로웠다. 다양한 소셜 미디어는 끊임없이 우리를 친구와, 온라인 유명인과, 심지어는 외국의 낯선 이들과도 손쉽게 연결시켜주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들 꽤 외로웠다. 그러지 않고서야 "연애는 귀찮지만 외로운 건 싫어" 같은 드라마 제목이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이해되거나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에 코로나가 창궐한 이후에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새로운 공공 질서가 되면서 정말 외로워야만 의로운 세상이 되었다. 주말 저녁 친구들을 만나 떠들썩한 술자리를 갖는 건 언감생심 바랄 게 못 되는 일이고, 일터조차 원격근무를 하는 게 훨씬 안전한 세상이니 말이다. 이렇게 우리는 '현대인의 외로움' '기술의 발달' 같은 그간의 이유와는 또 다른 이유로 서로 물리적으로 멀어지게 되었다. 


그래도 이 결별이 우리에게 안겨준 한 가지 긍정적인 면이 있다면 그간 남을 쫓느라 방치했던 나를 좇을 여유를 주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니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물론 중요하지만, 사실 무엇보다 내가 나랑 잘 지내는 게 제일 중요하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전에 없던 집중력을 쏟다보니, 내 정신 그리고 더 나아가 내 육체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고백하건대, 나는 내 몸에 무심한 사람이었다. 

몇 해 전 나는 허리 통증이 너무 심해서 며칠을 고생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였나면 호호백발 할머니마냥 허리를 똑바로 피지를 못해 몸을 구부정하게 굽히고 걷는 게 최선이었다. 상태가 그 지경인데도 나는 가벼운 물리치료조차 받으러 가지 않았다. 일이 바빴기 때문이었다. 늘 그런 식이었다. 애초부터 몸이란 건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나는 지나치게 의욕적인 사람이었고 항상 중요한 건 그래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이지 그걸 실행해야 하는 육체는 아무런 의사결정권이 없었다. 그 허리를 부여잡고 친구와 점심을 먹고 돌아와 침대에 누운 토요일 이후, 나는 침대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몸을 가동시키는 데 허리가 그렇게 필수적인 줄 그때서야 처음 알았다. 밥도 먹을 수 없었고 화장실도 갈 수 없었다. 그 주말 내내 뾰족한 수 없이 울면서 누워만 있다가 월요일 그야말로 병원에 '실려가' MRI 촬영을 했다. 디스크가 이미 두 개가 나갔다며 MRI 사진 속 척추뼈 사이는 좁은 검은 공간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나는 말기암 선고라도 받은 사람처럼 오열했다. 통증을 완화시켜주는 주사를 척추에 맞고서는 엘리베이터 하나 찾기 힘든 교대역의 끝없는 계단 앞에서 절망하며 나는 생각했다. 내가 왜 그랬을까. 내가 왜 이렇게 될때까지 몇시간이고 야근을 하고 정신없이 일을 벌이고 다녔을까.   

그 뒤로 그전의 일상 생활이 가능한 수준, 더 이상 허리 통증이 매 순간 신경쓰이지 않는 데까지는 거의 일년 가까이가 걸렸다. 이것도 나름 불치병이라고, 인공 디스크 삽입술을 받지 않는 이상 이미 닳은 디스크가 다시 생길 수는 없으니 할 수 있는 노력은 허리 근육을 키워서 척추 부담을 줄이거나 몸을 살살 다루기 정도였다. 특히 나에게 필요한 것은 몸을 돌아보는 연습이었다. 정신의 세계에 그만 살고, 육체의 세계에 살 필요가 있었다. 피곤하면 쉬기, 아프면 병원 가기, 몸이 회복될 여유를 두기. 여행을 계획할 때마다 그런데 허리가 아프면 어쩌지 내 몸이 버틸 수 있을까 이런 전에 없던 고민을 해야 한다는 게 너무 낯설고 또 괴로웠지만 그간 육체를 무시한 대가랄까 익숙해져야 했다. 


물론 버릇을 쉽게 고칠 수 없어 나는 여전히 다른 곳이 아프고 매번 반성하며 살고 있다. 어머니로부터 '너는 나보다 30년이 젊은데 어째 몸 증상이 늙은 나랑 똑같니'라는 타박을 듣기 싫어서라도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육체를 생각하고 있자면 어쩐지 민망하달까 부끄럽달까. 정신 대 육체라는 명제 앞에서 인류의 지성들은 동서양과 고금을 떠나 한결 같이 정신의 우월함과 육체의 열등함을 강조해왔다. 감정적 충동, 식욕과 성욕, 하다못해 피로까지도 모두 부정의 대상이었다. 공자는 '극기복례(克己復禮)'를 주창하며 자신의 사사로운 욕심(육체)를 이겨내고 언행을 예에 합치시킴(정신)으로써 인(仁)을 이룰 수 있다고 하였고, 데카르트의 너무도 유명한 명제인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비물질(정신)이 물질(육체)보다 우월한 개념임을 설파하고 있다.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만 울어야 해' 같은 문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던 게 엊그제인 걸 돌이켜보면 육체와 그 육체로부터의 표현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여겨졌는지 체감할 수 있다. 감정은 나약함의 상징이고, 강건한 정신력으로 육체의 한계를 극복해내는 게 아주 자연스럽게도 우리 사회의 미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마다 인간도 동물이라는 문장을 열심히 떠올린다. 굳이 말하자면 육체보다 정신이라기보다는 정신보다 육체라고 말하는 게 생물로서의 인간에 더 적합할 것이다. 침팬지는 인간과 유전자가 98%이상 동일하다는데, 우리와 침팬지 사이의 차이를 만드는 게 고작 2% 이내라면 공통점을 만들고 있는 나머지 대다수가 훨씬 더 신경써야 할 일일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예컨대 걷기를 생각해본다. 몸을 움직이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인 걷기는 단순한 육체적 건강뿐만 아니라 정신적 건강 또한 달성하게 한다. 걸으며 몸을 움직이면 즐거움 호르몬인 도파민 그리고 세로토닌이 분비되며 감정이 안정되는 효과가 있다. 뿐만 아니라, 걷기는 안 좋은 생각을 줄여주는 효과도 있다. 걸으면서 우리 몸은 다양한 감각 자극을 받게 되고 그 정보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불필요한 생각이 줄어든다. 또, 햇빛을 쐬는 행동은 어떠한가? 이것도 걷기와 마찬가지로 세로토닌을 활성화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조량이 적은 북유럽 국가의 높은 계절성 우울증 통계도 흔히 통용되는 증거이다. 


TV에 나오던 유명 연예인이 말버릇처럼 하던 말이 있다.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한 겁니다.” 웃자고 하는 얘기 같지만 이것은 과학적으로도 증명된 사실이다. 일부러 웃는 표정을 짓게 한 뒤 스트레스 받는 행동을 수행하는 실험을 진행한 결과, 중립적인 표정을 지은 상태로 동일한 행동을 수행했을 때보다 수행 이후 스트레스가 감소하는 속도가 더 빨랐다고 한다. 정신이 우리의 육체를 일방적으로 지배하는 것도 아니고, 행복하니까 웃는 게 전부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육체가 정신을 선도하는 면도 있다. 


나의 뼈아픈 고통기에서도 그렇지만, 육체가 미비하다는 것은 정신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려는 데 몸이 따라줄 수 없다는 공포심은 참으로 바닥이 없는 암담함이다.   

그래서 혹여나 누군가 또 지나치게 정신을 좇느라 몸을 돌보지 않고 있다면 꼭 말해주고 싶은 기분이 든다. 몸을 무시하지 말고, 꼼꼼하게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자. 정신 이전에 우리가 숨쉬고 움직이며 살아있는 존재임을 기억하고 그것 또한 '고상한' 우리만큼 중요하다는 걸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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