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의 고전 질문 중 본성과 양육(nature vs. nurture)이라는 해묵은 주제가 있다. 나는 선천적으로 주어지는가, 아니면 후천적인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가? 우리가 '나답게'라는 표현을 쓰곤 하지만 도대체 '나답게'라는 것은 언제부터 존재하는 걸까? 언뜻 생각해도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난 갓난 아기에게 '나답게'를 요구할 수는 없을테다. '나답게'라는 것은 당연히 본성과 양육 두 가지 요소가 합심하여 형성된다.
'나답게'라는 것은 그러니까 상당히 재밌는 개념인 것이다. 어쩐지 매우 중요하고 꼭 지켜야할 것 같지만, 그 기원이 어디인지, 언제부터 우리는 나다움을 갖게되는지는 모호한. 그런 점에서 사춘기는 이 '나답게'라는 것이 가장 혼란한 시기일테다. '나답게'를 지키고 싶어서 정제되지 않은 상태로 사방을 휘저으며 삐죽거리다가도, '나답게'를 하나도 지키지 못한 채 또래와 주변 상황에 쉽게 휘둘린다. 때때로 '나답게'를 모두 죽여가면서까지, 동조에 대한 욕구가 솟구친다.
무수한 타인과의 마주침 끝에서 늘 나답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즐거운 마주침에서는 나다움을 잘 지키며 살고 있는 타인을 배우고 싶어서 그런 마음이 들고, 고단한 마주침에서는 나를 해치는 타인의 기운에 지고 싶지 않아서 그런 마음이 든다.
"나는 특별한 존재다. 동시에 특별하지 않은 존재이다"
의외로 자신을 방치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무지해서, 혹은 무서워서. 타인이 나를 무성의하게 대하고 있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그냥 '그런가보다'라고 생각해버렸다. 예의바르게 굴어야 한다는 교육에 익숙해서, 무례를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 후 무언가 마음이 개운치 않아 돌이켜보면 사실 그렇게 넘기면 안되는 일이 많았다. 또 때로는 스스로에게 미안하게도 내가 내 손으로 나를 하찮은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경우가 있었다. 나를 소중하게 대하지 않는 사람을 끊어낼 줄 알았어야 했는데, 외로움과 두려움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하지 못했다. 전자도 별로이지만, 후자는 스스로에게 저지르는 죄가 선명하므로 더욱 괴롭다.
그래서 장난스럽게 '내 목표는 미친자'라고 말해보곤 한다. 정확히는 '멋진 미친 자'가 되고 싶다. 훌륭한 인격자를 목표로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방치되는 상황을 묵과하지 않는 것. 필요하다면 나서서 나를 지킬 수 있는 것. 이것은 생각보다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난다 작가의 <어쿠스틱 라이프> 중 시즌 11 <싸워야할 때>
건강한 '공격성'이라는 표현은 오래도록 내 마음에 남았다.
한편으로는 스스로가 특별하지 않은 존재라는 것 잊지 않으려 한다. 자신만의 세계에 갇힌 바보가 되고 싶지는 않다. 나는 확실히 쉬운 사람이 아니고, 타인에 대한 정오 판단이 빠르며,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타인을 쉬이 긴장시킨다. 그래서 의식적으로라도 타인의 의견을 폭넓게 수용하려 한다. 내 단점에 발을 헛딛지 않도록 한다. 그래서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
오랫동안 부정적인 방향으로 내 정신 세계에 닻을 내린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전형적으로 이 우에 빠진 사람이었고, 그 자기 인지는 말문이 막히는 수준이었다. 언제든, 내가 열화하면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섬뜩함을 마음 한 구석에 가지고 있다. 썩 유쾌하지는 않지만,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것, 내 생각이 한 방향으로 치우쳐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둔다.
관계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 한다
"..20대 때 많이 고민한 게 친구 문제였어요. 저랑 엄청 친하긴 한데 성격은 괴팍한 친구였죠.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친구니까 불편해도 이해해야 하나, 아니면 이해 가능한 사람과 친구로 지내야 하나…결국 후자를 선택하고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만 친구로 삼겠다고 생각했어요…비슷하게, 술자리에서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가면 그게 본성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 있는데 전체적으로 술을 마셔서 그런 거니 이해하자는 분위기였어요. 그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죠. 훈계하자니 용기도 없고 언변도 달리고. 다들 괜찮다는데 나는 불편하고. 그런데 생각보다 간단한 거였어요. 그냥 그 자리에 안 가면 되고, 안 보면 되는 거죠. 10년 뒤에도 이 선택이 옳다고 생각할진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선 그래요"
- 위근우, <젊은 만화가에게 묻다 - 어떤 일, 어떤 삶 03> 중 이동건-<유미의 세포들>
사랑받고 싶고, 원만하게 지내고 싶어서 목에 껄끄럽게 남는 일들을 애써 이해해보려고 부단히 노력했었지만, 사실 그런 것들은 내 마음을 다치게 하면서까지 이해할 필요는 없는 것들이었다. 무례함이라는 폭력을 마주쳤을 때 내 생각만큼 행동하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자괴감을 느끼는 것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에 스스로를 할퀼 정도로 고민했지만, 그것 또한 고민의 방향이 아니었던 것이다. 정말 중요한 건 내 감정을 직시하고 나를 지키는 것이었는데, 두려운 마음에 계속 문제의 본질을 일부러 보지 않았다.
심리학에는 분화(differentiation)라는 개념이 있다. 이것은 융합(fusion)과 구분되는 것으로, 한 개인이 환경과 상호작용을 하면서도 스스로의 자율성을 잃지 않으며 고유한 특색을 지켜내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관계의 핵심은 여기에 있겠거니 싶다. 나의 중심을 유지하면서 타인과 상호작용하고 환경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
그래서 더이상 관계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 한다. 좋은 관계는 물론 중요하지만 그 어떤 것도 내 행복보다 더 중요한 목적이 될 수 없음을 잊지 않으려 한다.
스스로를 돌보는 것을 잊지 않으려 한다
마음의 손잡이가 문밖에 달려 있어요. 마음에 경계가 없어서, 타인한테 맞추느라 외적으로 내적으로 너무 힘들어요. 만약 타인이 계속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을 벌리고 있다면, 그건 본인이 계속 기준선의 경계를 뒤로 보내면서 그걸 허용했기 때문이에요. 왜 쓰레기를 받아요? 쓰레기인 걸 알면 일단 받지 말아야 해요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칭찬은 '착하다'라는 말이었다. 세상에 자기보다 남을 더 위하는 그런 사람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더더군다나 스스로를 착한 사람이라고 절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번은 상담을 받으면서 의외로 내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사람(??)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정확하게는 내 행복의 기준점이 다른 사람에게 달려 있다고 했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데 보람을 느끼고 그걸 할 수 있(다고 믿)는 스스로를 원해왔다. 아무래도 어릴 적 착한 아이라는 칭찬을 너무 많이 받았던 탓인 것 같다. 어른들의 달콤한 칭찬에 중독되어, 타인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곧 나의 행복이라고 배워버렸다.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나서도 꽤 오랜 시간, 열심히 일한 것은 딱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내 일인데 허투루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 둘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편하고 즐겁게 일했으면 좋겠다는 마음. 성과를 내고 보상을 잘 받겠다는 목표를 가진 프로직장인은 되지 못한, 아름다운 마음씨일지 모르겠지만, 남을 위해 사는 인생은 너무도 피곤하다. '내게 그럴 여유가 있으니까' ‘다 받아줄 수 있어’라고도 믿어왔지만, 내가 나를 과신했나보다. 내구성이 다해버린건지 종종 넝마주이가 된 스스로를 발견한다.
또 놀랍게도, 이렇게나 생각이 많고 예민한 내가 스스로에 대해서는 의외로 아는 게 적다는 것도 깨닫는다. 내가 내 마음을-내 힘듦을-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느라 노력하는 만큼 알아내려 애쓰지 않았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 왜 그렇게 느꼈어요? 그때 어떤 기분이었어요? 상담 선생님에게 질문을 받으면 영 대답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정작 스스로에게 중요한 심리적 지점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는 나를 챙기고 싶다. 내가 생각하는 문장들이 ‘나는’으로 시작하길 바라고, 내가 신경쓰는 감정이 타인의 감정이 아니라 나의 감정이길 바란다. 그래서 내가 나로서 더 행복하고 싶다.
구구절절하게 적었지만 모두 비슷한 얘기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또 어쩌면 타인을 완벽하게 내 삶에서 배제한다는 얘기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역시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한 것은 타인이었다.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 얼마나 나의 삶을 감화시켰는가. 때로는 타인으로 인해 강제로 규정되고 고통받지만 또 그만큼 타인으로부터 구원받고 종국에는 타인과 구별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타인의 삶을 이해해보려 무던히 애쓰던 지난날은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눈, 나의 깊이, 나의 세계관이 되었다. 그래서 그 끝에서 사실 제일 만나고 싶었던 것은, 스스로라는 타인이었다.
타인을 통해 나를 만난다. 그들의 흔적 속에서 나를 발견한다. 스스로가 인정하지 못한 나를, 스스로와 조화하지 못한 나와 만난다.
그 낯선 ‘타인’과 이제는 그만 화해한다.
나답게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