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 몸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큰 꿈을 꾼 적이 있었던가?
어릴 적 누군가는 서투르게 색색의 크레파스를 휘두르며 대통령을, 우주비행사를, 과학자를 장래 희망으로 그려낼 때에 난 무엇을 그렸던가 싶다. 그 다음에 생각해봤던 꿈은 교사 혹은 작가였다. 중학교나 고등학교 때 장래희망을 적어내야만 하는 때가 있으면 적당히 그런 직업들을 둘러댔다. 그나마 제일 친숙한 직업이었고 그저 책읽는 걸 좋아했기 때문에-그리고 알량한 글솜씨로 몇번 어른들의 칭찬도 받고 소소한 상도 탔었기 때문에, 그런 걸 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현실적인 추론에 가까웠다. 딱 한번 원대한 꿈을 꾼 적이 있다면 <노벨 문학상을 받는 나> 정도일까. 전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할 즈음 그런 망상을 종종 했다. 전세계 사람들이 내 이름을 알게 되고 내 글솜씨가 다른 언어를 가진 사람들조차 찬탄할만큼의 무엇이 된다면…온 몸에 나른한 열기가 피어오르곤 했다.
그 정도였다. 그나마 머리가 덜 여문 시절 가졌던 꿈조차 내 미래를 암시하는 표지가 되지는 못했다. 나는 그저 뻐근한 관절을 다독이며 힘겹게 일어나 해가 뜬 동안 정신없이 타인의 야망을 성실하게(그러나 아주 조금) 실현시키고선 날이 저물 즈음에야 나를 위한 시간을 쪼개 일용한 양식을 채우며, 이렇게 계속 살아도 되는 걸까 걱정하는 체를 하고선 늦은 밤 잠을 뒤척이는 미래에 도달했을 뿐이다. 그래서, 원대한 꿈을 여전히 간직한 야망가들을 보면 되려 의문이 든다-나는 왜 한 번도 저런 대단한 꿈을 꾼 적이 없지?
실은 나는 만족하고 있었다. 타인을 위한 유능한 부품이 되는 데 거리낌이 없었고, 나의 기능성이 자랑스러웠다. 야망은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것이다. 대단한 부와 명예가 나는 그다지 아쉽지 않았다. 그것을 경시한 것도 아니고, 동화처럼 하루 아침에 그런 것들이 내 손에 쥐어진다면 기뻐하지 않을 것도 아니었지만, 하여간에 나는 그런 야망을 끈기있게 좇기에는 다른 더 작은 것들을 사랑했다. 당장 내가 해보고 싶은 것이 더 중요했다. 이번 주말 내가 탐험해보고 싶은 동네, 다음 달 계획된 낯선 장소로의 여행, 올해가 가기 전에는 배워보고 싶었던 것들. 이런 것들을 일종의 일상성이라고 한다면, 나는 일상적인 사람이었다. 행복은 크기가 아니라 빈도라는 말을 굳게 믿었다. 되려 너무 거대한 미래는 버거웠다. 그래서 뭐? 남에게 내 이름을 널리 알리면, 내 하루하루가 행복한가? 나는 거대함을 위한 답을 찾지 못했고, 나의 지향에 믿음이 있었다.
무엇보다, 어차피 나는 에너지가 넘쳤다. 나는 타인의 야망에 봉사하는 동시에 나의 일상성을 돌아가게 할만한 에너지가 충분했다.
그런데 그 에너지는 생각보다 빠르게 고갈되었다. 내 일상을 유지하기 위한 요인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던 변수가 튀어나오면서 나의 육신을, 나의 정신을 마구 흔들었다. 당연한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은 것들이 되었고,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이 부러워졌다. 문제가 생긴 건 몸이었지만 마음 또한 길을 잃었다. 예전에 나를 즐겁게 하던 것들을 그 빛을 잃었고 나는 내 일상을 잃었다.
어딘가 몸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