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hengrin Jun 30. 2020

장맛비 틈새로 보이는 것들

장마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냄새와 풍광이 있습니다. 장마의 사전적 의미인 "계속해서 많은 비가 내리는 현상"속에 모든 의미가 숨어있습니다. 비 냄새가 가시지 않고 머물고, 두꺼운 회색 구름에 가려져 시간의 밤낮조차 구분할 수 없게 합니다.


과학적 분석이야 "북태평양 기단과 오호츠크 해 기단 사이에서 형성되는 한대 전선에 의해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장마의 이미지가 주는 느낌은 소설 속 스토리로 더 가깝게 다가옵니다. 이 땅의 자연조건속에서 공진화하는 우리네 모습이기에 그렇습니다. 촉촉이 젖은 보도 위를 걷는 기분이며 잠시 내리기를 멈춘 산허리의 물안개 올라가는 모습조차 장마철 우리네 마음 한켠을 차지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지난밤에는 바람도 제법 불어 빗줄기가 창문을 때리더니 이 아침은 조용히 빗 창살을 구름과 대지 사이로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피해 갈 틈을 보이지 않을 만큼 촘촘히 내리꽂습니다. 할 수 없이 우산을 펼쳐 인공의 가림막을 만들어 빗 창살을 헤치고 출근을 합니다. 멀리 바라보이는 건물과 산은 빗속에 함몰되어 형체가 희뿌엿습니다. 몽환적이기까지 합니다.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했던 동양의 미술가들은 정경교융(情景交融 ; 사람의 심경과 자연의 모습이 서로 융화되는 상태)의 상태를 최고의 경지로 여겼는데 바로 이 아침의 모습에서도 그 심상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내리고 있는 빗물이 도랑을 이루어 흘러가고 가로수 잎의 짙녹의 색깔까지, 심지어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는 빗방울의 궤적까지도 수묵의 농담 속에서 표현되는 한 폭의 그림처럼 다가옵니다.


인간의 감각을 넘어 교감할 수 있는 능력을 일찌감치 눈치챘던 선인들은 바로 감각의 한계와 표현의 극한 경계까지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미 2500여 년 전, 서불진언 언불진의 (書不盡言 言不盡意 ; 글로써 말을 다 표현할 수 없고 말로서 의미를 다 표현할 수 없다)라는 말로 인간의 교감 한계를 표현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과학이 발전해도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의 심상에는 큰 변화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46억 년 지구 역사 속에서 2,500여 년은 티끌에 지나지 않는 순간이긴 하지만 시간의 연속성에서 과거의 시간을 이어받아 현재를 살고 표현해야 하는 "지금 이 시간"의 존재들에게는 능력의 지속성과 연속성을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일 겁니다.

날씨의 흐리고 맑음이 인간의 심성까지 좌우하는 것은 인간은 역시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한치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아침 비 내리는 풍광은 비구름에 휩싸인 바위산과 소나무 그리고 계곡을 흐르는 냇물과 머리 감는 아낙네가 있는 그런 동양화의 그림과 오버랩됩니다.


전형적인 장마철의 눅눅함이 배어있긴 하지만 회색빛 풍광이 주는 차분함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빗속에 만들어낸 우산 속 공간의 아늑함에 안심하는 그런 아침입니다. 바지를 둥둥 걷어올리고 맨발에 샌들 신고 우산 하나 손에 든 채 비 냄새, 풀냄새 은은히 전해오는 섬진강 오솔길을 걷고 싶은 그런 아침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임산부 배려석과 사회의 수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