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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Jun 29. 2020

임산부 배려석과 사회의 수준

전철이 플랫폼으로 들어옵니다. 전철이 플랫폼으로 들어오며 천천히 속도를 줄이고 각 차량의 출입문에 맞추어 정렬을 하고 설 때까지 잠깐 사이, 전철 안을 재빨리 둘러봅니다. 어느 방향으로 발걸음을 해야 빈 좌석에 앉을 수 있는지를 알고자 함입니다. 출입문이 열리면 재빨리 미리 봐 둔 좌석 쪽을 향하여 발길을 잡습니다. 그러다 옆문에서 들어오는 사람도 그 자리를 점찍어 놨는지 좌석 앞에서 마주칩니다. 보통은 간발의 차이로 빈 좌석에 먼저 온 사람이 앉게 됩니다. 하지만 그 미묘한 차이로 좌석에 앉느냐 못 앉느냐가 아침시간의 기분을 좌우하는 것을 지켜보게 됩니다.


저는 좌석에 앉느냐 못 앉느냐의 2가지 변수에 따라 환승하는 역을 달리 합니다. 못 앉으면 세 정거장 간 회기역에서 1호선으로 갈아타고, 앉게 되면 다섯 정거장을 더 가 왕십리역에서 2호선으로 환승합니다. 어느 역에서 갈아타든 시청역까지 오는 시간은 비슷합니다.

다행히 오늘 아침은 월요일임에도 회기역에서 갈아탄 1호선 전철도 여유 좌석이 많습니다. 에어컨이 작동되는 천정을 살피고 앉을 정도로 빈자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임산부 배려석 바로 옆자리에 앉았습니다. 아침 이른 시간이고 빈자리가 많으면 이 '임산부 배려석'에는 보통 사람들이 앉지 않습니다. 오늘도 '임산부 배려석'은 배려되어 주인이 앉을 때까지 비어있는 여유를 보입니다.


그런데 한 정거장이 지나고 사람들이 우르르 타자 '배려석'은 더 이상 배려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는 젊은 청년이 주저 없이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중간중간 빈자리가 있음에도 말입니다. 곁눈질로 계속 청년을 째려봅니다. 눈치가 없는지 계속 게임에만 몰두합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시청역에서 내릴 때까지 서 있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빈 좌석이 남아 있었습니다.


우리 사회는 '공동의 善'을 정해놓고 실천하는 사회일까요? 배려석은 말 그대로 약자를 위해 양보하여 보호하자는 약속입니다. 법적인 구속력은 아닐지라도 우리 사회의 양심을 시험하는 심판대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전철에서 이 양심의 심판을 저울질하고 평가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물론 빈 좌석 하나 남겨놓고 가타부타 사시를 끼고 본다고 할 수 도 있습니다. 신체 건강한 청년이 앉으면 어떻습니까? 임산부가 승차하면 그 자리를 비워주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양심의 저울은 아주 미세합니다. 양으로 기우는 것이 아니라 질로 인하여 기운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 질로 인한 저울추의 기울어짐을 우린 '수준'이라 부릅니다. 우리 사회의 수준을 바라보고 평가하는 척도입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 사회의 수준이 딱 여기까지 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제 수준이 더 높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회 공통적인 수준이 이러하기에 거기에 매몰되어 생각하는 범위가 그 수준을 넘지 못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더 나은 공동 善을 위해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한데 우리 사회는 비평과 비난으로 얼룩져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가기가 정말 힘듭니다. 정치가 그렇고 제갈길만 주장하는 사회단체들도 그렇습니다. 그것 또한 그 우리 사회의 수준을 잘 말해주는 현상입니다.

하버드 대학에 인문학 모임이 2개 있었답니다. 하나는 문학비평 모임이고 또 하나는 문학토론모임이었답니다. 비평 모임 참가자들은 회원들이 쓴 글들을 세밀히 분석하고 신랄하게 비평을 해주었고 토론모임 참가자들은 글에 대해 좋은 점, 잘 쓴 점에 대해 칭찬을 해주었다고 합니다. 20년 후 두 모임에 속해 있던 회원들 중에 비평 모임 참가자들은 한 명도 성공한 사람이 없더랍니다. 반면 토론모임에서는 절반 이상의 회원들이 상당한 수준의 글과 소설을 쓰는 사람으로 성장해 있었습니다.


우리 사회는 비평을 하고 남의 잘못을 지적하면 우수한 사람으로 착각합니다. 마치 많이 알고 잘 알아서 비평을 하는 줄 아는 것이죠. 아무 노력하지 않아도 남을 욕하고 비평하기가 가장 쉬운 일인데 말입니다.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무언가 지적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으로 취급받기 싫어, 반대의 의견을 내놓습니다. 나중에 결과가 어떻게 되든 일단 부정적으로 보게 됩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딱 그렇습니다. 같은 현상을 보는 두 시각중, 우리는 비평과 비난의 시각으로 먼저 봅니다. 긍정과 믿음의 시각은 뒤에 있거나 의견을 내지 못합니다. 우리의 수준을 결정하고 나라의 국격을 결정합니다.


대한민국은 세계 속에서 계속 성장할 수 있을까요? 이러다 한방에 훅 가, 지구 상에서 사라진 민족이 되지 않을까요? 필리핀 및 남미의 여러 나라들이 지속적으로 성장치 못하고 침체되어 온 경험을 우리는 왜 반면교사로 삼아 개선치 못하는 것일까요? 바로 100년 이상을 내다보고 사회를 구성하며 이끌어가는 시스템과 지도층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앞선 사람들을 양성하지 못하는 사회구조 때문입니다. 모두 알면서도 시행하지 못합니다. 이미 사회의 구조가 실타래 엉키듯 그렇게 꼬여 어느 한 곳이 실행한다고 개선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긴 안목으로 서서히 변할 수 있음을 확신하며 과감히 결단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게 현재를 충실히 개선해 나가야 미래를 예측하고 보장할 수 있습니다. 사회는 혁명을 통해 패러다임을 바꾸기도 하지만 漸修의 은근함과 끈기도 곁들여져야 제 기능을 발휘합니다. 근본과 바닥이 탄탄해야 허물어지거나 흔들리지 않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뮐세"라는 용비어천가 문구가 전철 임산부 배려석에 오버랩되는 아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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