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진정한 묘미는 오감이 기억하는 순간에 있다. 눈으로 풍경을 담고, 입으로는 낯선 음식을 맛보며, 마음으로는 그 땅의 사람들을 느끼는 것. 그래서 나는 여행의 3대 요소를 ‘맛있는 음식’, ‘아름다운 뷰’, ‘현지의 삶 체험’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셋이 어우러질 때, 여행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오랫동안 기억되는 추억으로 남는다.
열흘간의 포르투갈 여행은 그 정의에 딱 들어맞는 여정이었다. 리스본과 포르투를 오가며, 가보지 않은 소도시를 둘러보고, 에어비엔비 숙소를 거점 삼아 부지런히 맛집도 찾아다녔다. 하몽 전문 식당, 한국 여행자들 사이에서 입소문 난 해물밥 집도 들렀다. 하지만 이 모든 여정 속에서 유독 잊히지 않는 한 곳이 있다. 별 기대 없이 찾았던, 리스본 조르주성 아래 골목의 작은 선술집이다.
포르투 여행을 마치고 리스본으로 내려온 지 사흘째 되는 날, 근교의 알카사바와 오비두스를 둘러보는 투어를 마치고 숙소에 도착하니 오후 6시. 온종일 걷고 버스를 탄 터라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멀리 나갈 힘은 없고, 그냥 숙소 근처에서 저녁을 해결하자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며칠간 지나며 눈여겨봤던 한 식당이 생각났다. 작고 분위기 있어 보이던 그곳. 하지만 이미 대기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무려 15팀. 최소 1시간은 기다려야 한단다. 발길을 돌렸다.
대안을 찾느라 다시 검색을 돌렸다. 후기 평이 좋은 식당 하나가 바로 근처에 보였다. 숙소에서 불과 100미터. 7시 50분쯤 도착했는데,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상태. 간판 아래에는 “Open at 8 PM”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조금 기다리기로 했다. 신기하게도 8시가 가까워지자 하나둘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더니 우리 뒤로도 줄이 30명쯤은 더 늘었다. "이렇게 인기 있는 식당이었나?" 횡재한 기분이 들었다.
드디어 8시, 문이 열렸다. 그런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예약하셨나요?”라는 직원의 질문. 하지 않았다. 예약 손님 먼저 들어가고, 15분 이상 시간이 지나 노쇼가 생기면 자리를 준다고 한다. 사실 이런 인기 식당에 사전 예약을 하지 않았다는 건 순전히 우리의 과실이다. 그래도 기다려보기로 했다. 다행히 약 20분쯤 지나, 식당 안쪽의 자리를 배정받았다.
내부 분위기는 정말 독특했다. 고급 레스토랑과는 정반대의 느낌. 테이블 간격은 거의 붙다시피 했고, 메뉴판도 없었다. 벽에 붙은 칠판을 직접 보고, 휴대폰으로 찍어 주문해야 했다. 문 앞 입간판에 적혀 있던 문구—“Fine Dining is Dead!”—가 그제야 이해되기 시작했다. 형식이나 격식은 철저히 거부한 공간. 대신 자유롭고 솔직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우리는 와인 한 병과 맥주 두 잔을 먼저 주문했다. 음식은 Grilled Octopus, Lamb Kofta Flatbread, 스테이크 타르타르, 그리고 ‘Kimchi Mayo’가 들어간 돼지고기 핫도그 등 다섯 가지를 선택했다. 김치라는 단어에 혹해 주문했지만, 정작 김치는 없고 김치맛을 냈다는 마요가 곁들여져 있었다. 솔직히 김치맛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 나름대로 독특한 조합이었다.
타파스처럼 가볍게 먹는 음식이었지만, 양은 애매했다. 술안주로 치기엔 조금 많고, 한 끼 식사라고 하기엔 조금 부족한 정도. 그래도 음식 맛은 제법 괜찮아 입맛에 맞는다. 하루 종일 2만 보 가까이 걸었으니 무얼먹든 맛있지 않은 것이 이상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보다 더 인상 깊었던 건 음식이 담겨 나오는 ‘접시’였다. 군데군데 이가 빠지고 가장자리가 깨진, 보기 드문 접시들.
처음엔 ‘이거 관광객 무시하는 거 아냐?’ 싶은 의심이 들었지만, 다른 테이블들도 모두 비슷한 상태였다. 그제야 “Fine Dining is Dead”의 의미가 선명해졌다. 이곳은 격식을 깨고 자유를 만끽하는 공간이었다.
옆 테이블과의 간격은 너무 가까워 마치 함께 온 일행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오히려 유쾌하게 다가왔다. 꾸미지 않은 공간에서 사람들의 이야기와 웃음소리가 가득했고, 포르투갈 젊은이들이 일상의 피로를 털어놓는 모습을 보며 우리도 그 일부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결국 와인 한 병, 맥주 두 잔, 음식 다섯 가지에 72유로. 고급 레스토랑은 아니었지만, 어떤 식당보다 더 진한 인상을 남긴 곳.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뜻밖의 경험을 통해, 잊지 못할 밤이 되었다.
아마도 여행이란 그런 것 아닐까. 검색하지 않았더라면, 예약하지 않았더라면, 발길을 돌리지 않았더라면… 만나지 못했을 우연이 결국 기억 속 가장 강렬한 추억이 된다. 그리고 그 밤의 리스본, “Fine Dining is Dead!”라는 선언 속에서 오히려 가장 솔직하고 인간적인 식사를 했던 그 순간이야말로, 이번 여행의 진정한 클라이맥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