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보는 틀이 바뀌었다. 다수의 국민이 부여한 권력의 틀이다. 공동체의 유지와 번영을 위해 한쪽으로 몰아갈 수 없다는 명제를 안고 있다. 어제보다는 나은 세상이 되는 오늘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힘을 모으는 시작이 되었으면 좋겠다.
어떻게 보면 세상이 바뀌었는데 이렇게 조용할 수가 있는가? 누구에겐 떠들썩한 축제라도 벌여야 할 테고 누구에겐 절치부심, 와신상담의 심정으로 분기탱천할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이렇게 조용하고 평온하게 느껴지는 아침의 풍경이 바로 세상의 모습이다. 세상사도 그렇고 자연도 그렇고 우주도 그렇고, 이렇게 정해진 길을 무소의 뿔처럼 묵묵히 가는 것, 이것이 세상사는 이치이자 우주의 운행원리다.
우주는 실체로 구성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물질이라고 부르는 것들조차, 고정된 단일 실체가 아니라 조건과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정체성을 부여받는다. 질량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관계의 산물일 뿐이며, 고정불변한 실재가 아니다. 관찰자와의 관계, 운동 상태, 외부 힘과의 상호작용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관계다. 관계는 언제든 바뀔 수 있으며, 그 관계의 기준조차도 결국은 ‘내가’ 설정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관점은 양자역학과 현대물리학의 중요한 통찰 중 하나인 최소작용의 원리와 닿아 있다. 이 원리에 따르면, 자연은 목적이 있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경로 중 가장 ‘작용(action)’이 작은 경로를 취한다. 이것은 자연스러움의 다른 표현이다. 인위적인 저항이나 비효율을 줄이고, 마치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가능한 한 에너지를 덜 쓰는 방향으로 세계는 움직인다.
인간도 예외는 아니다. 인간의 행동 또한 ‘최소작용’이라는 물리적 법칙 아래 놓여 있다. 다만 인간의 경우, 이 최소작용은 단지 에너지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와 의미, 선택과 창의성이라는 개념을 수반한다. 인간의 창의성은 언제나 ‘차이’에서 나온다. 차이는 정체성의 씨앗이며, 그 차이 안에서 우리는 의미를 발견하고, 그 의미 속에서 삶의 방향을 설정한다.
그러나 그 차이가 크면 클수록 긴장과 불안, 스트레스가 생기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가장 편안한 상태를 찾아 그 차이를 ‘최소화’하려 한다. 이것이 인간 삶에 있어 라그랑지안과 헤밀토니안의 철학적 확장이기도 하다. 위치와 속도의 함수로 기술되는 라그랑지안, 위치와 운동량의 함수로 표현되는 헤밀토니안은, 단지 물리적인 개념이 아니라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는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라는 존재론적 질문과 연결된다.
이러한 인식은 삶의 태도에까지 영향을 준다. 세상일을 돌아보면 결국 우연보다는 확률적 존재론, 곧 운명의 필연성이 강하게 작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걷는 길은 수많은 변수 속에 열려 있지만, 그 안에서도 ‘가장 자연스러운’ 길이 우리를 이끈다. 우리는 자유롭지만, 동시에 정해진 흐름 속에 놓여 있다. 이러한 숙명론적 사고는 고대 그리스 신화 속 신탁 이야기에서도 반복된다.
대표적인 예가 아르고스의 왕, 아크리시오스의 이야기다. 그는 외손자에게 죽게 되리라는 신탁을 듣고 딸 다나에를 탑에 가둔다. 그러나 제우스가 황금비로 변해 그녀에게 접근하고, 결국 영웅 페르세우스가 태어난다. 페르세우스는 자라나 외할아버지를 찾아가는 도중, 우연히 참가한 경기에서 던진 원반에 의해 아크리시오스를 죽인다.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가장 자연스러운 경로가 결국 신탁대로 현실이 된 것이다. 이 이야기는 바로 최소작용의 원리, ‘그럴 수밖에 없었던 흐름’을 신화적으로 상징한 사례가 아닌가 한다.
오늘날 우리가 몰입하고 있는 심리검사나 성격 유형화(MBTI), 사주, 점성술조차도 결국 인간이 자신이 걷고 있는 경로가 최소작용의 원리 중 어느 지점에 해당하는지 알고 싶어 하는 욕망의 표현이다. ‘나는 지금 잘 살고 있는가?’ ‘이 선택이 나에게 최선이었을까?’라는 질문은 과학이든 점이든 철학이든 형태를 바꿔가며 반복된다. 이런 질문 자체가 이미 인간이 물리 법칙을 넘어 ‘의미의 원리’를 따라 살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물리학은 단지 입자와 에너지의 흐름을 설명하는 학문이 아니라, 인간 삶을 통찰하는 하나의 거울이 될 수 있다. 우주는 관계다. 인간도 관계다. 그 안에서 우리는 차이를 만들어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를 최소화하여 자연스럽게 살아가려 한다. 삶이란, 결국 최소작용의 미로 속에서 가장 부드럽게 흘러가는 길을 찾는 여정이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우리는 끝없이 묻는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는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가?”
"우리 사회는 바르게 가고 있는가?"
최소한 오늘 아침은 우리 사회가 바르게 가고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임이 틀림없다고 믿는다. 믿고 싶다. 아무 이유 없다. 그래야 오늘이 더 살만하고 더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