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TV 채널만 돌려도 눈길을 사로잡는 여행 프로그램이 넘쳐난다. 어느 순간부터 여행은 연예인들의 전유물이 되었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이들이 나와 현지 음식을 먹고, 바다를 배경으로 웃고 떠드는 모습이 리얼 TV 형식으로 전해진다. 웰빙과 치유, 힐링과 감성 같은 단어들이 자막을 가득 메우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여행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아니, 진짜 여행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여행의 TV 콘텐츠가 넘쳐나는 이 시대에, 한 편의 다큐멘터리가 다시금 떠오른다. 1984년, 일본 NHK가 제작하고 KBS가 방영한 다큐멘터리 '실크로드'. 매주 금요일 저녁, 집으로 달려가 본방 사수를 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에는 본방을 놓치면 끝이었다. 인터넷도, VOD도 없던 시절. 혹시나 재방송이 있지 않을까 싶어 주말 신문 속 TV편성표를 뒤적이던 아날로그적 절실함이 있었다.
이 프로그램은 단순한 여행기나 풍광 소개가 아니었다. 중국 서안에서 출발해 타클라마칸 사막을 넘어 천산산맥을 지난 그 길, 문명과 문명이 만났던 그 고요한 실크로드의 숨결이 30부작으로 담겼다. 음악가 기타로(Kitaro)가 작곡한 배경음악 'Silk Road'는 삭막한 사막 풍경에 낭만을 불어넣었고, 복사꽃 핀 오아시스 마을의 장면은 ‘무릉도원’이라는 단어를 각인시키며 언젠가 꼭 가보고 싶다는 꿈을 심어주었다.
그 시절 우리가 이 다큐멘터리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분명하다. 당시만 해도 중국과 국교를 수교하지 않았고, 일반인은 중앙아시아로의 여행 자체가 불가능했다. 냉전의 철의 장막 너머, 금단의 땅을 보여준 이 프로그램은 상상만 가능했던 세계를 잠시나마 들여다보게 해 주었다. 실제로 한국과 중국의 수교는 1992년에 이루어졌으니, 그전까지는 실크로드가 오직 스크린 속 낯선 풍경이자 이상향이었고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었다.
그런 실크로드의 낭만이 마음속 깊이 잠재되어 있었던 탓일까. 어제저녁, 자오성량 전 둔황연구원장의 ‘둔황석굴예술’ 강연에 초대를 받아 참석했다. 둔황은 실크로드의 분기점에 자리한 오아시스 도시로, 천산남로와 북로가 갈라지는 지점에 위치한다. 이곳은 단지 지리적 요충지가 아니라 문명, 종교, 예술의 혼종이 응축된 공간이다. 4세기부터 14세기까지 1천 년의 문화가 축적된 이곳 석굴의 벽화는 단순한 그림이 아닌 인류 문명의 타임캡슐이었다.
강연에서 특히 눈에 띈 장면은 고대 한국인의 모습이 남겨진 벽화였다. 신라인과 고려인의 모습. 자오성량 원장에 따르면, 둔황석굴 40여 곳에서 고대 한국인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2,800km나 떨어진 그 먼 곳까지, 대체 어떤 이들이, 어떤 사연으로 도달했던 것일까? 혜초처럼 불법을 좇아 인도로 향하던 순례자였을까. 아니면 외교 사절이었을까. 상인을 자처하며 낯선 땅에서 물건을 사고팔던 이들이었을까. 그 어떤 경우든 분명한 건, 그들은 단순한 여행자가 아니었다. 삶 전체를 건 길 위의 사람들이었다.
나는 마르코 폴로보다 이븐 바투타(Ibn Battuta)를 더 위대한 여행자로 꼽는다. 1325년, 단순한 메카 순례를 떠났던 그는 모로코로 돌아가지 않고, 무려 24년 동안 중동, 중앙아시아, 인도, 인도네시아, 심지어 중국 항저우와 베이징까지 10만 km 이상을 여행했다. 유라시아를 횡단한 그의 여정은 단순한 관광이 아닌 문명과의 충돌, 교류, 내면의 성장 그 자체였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여행이란 무엇일까? 요즘의 여행은 낯선 곳에서 인스타그램용 사진을 찍고, SNS에 ‘인생샷’을 남기는 것이 전부가 되어버린 듯하다. 물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새로운 풍경을 접하는 것도 여행의 일부다. 하지만 진정한 여행은 단지 스쳐가는 풍경을 보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그 풍경을 통해 나의 내면이 바뀌고, 세계를 보는 시야가 넓어지며, 결국 나 자신이 다시 정의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다시 묻는다. 무엇을 남기고 돌아왔는가? 가본 곳보다 더 중요한 건, 그곳을 다녀온 시선이다.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떤 감정을 느꼈으며, 무엇을 비워내고 무엇을 채워 돌아왔는지. 여행은 감탄으로 시작하지만, 질문으로 마무리되어야 진짜 여행이다.
둔황 석굴의 벽화 속 고대 한국인의 모습에서 나는 시간의 먼지를 헤치고 드러난 여행자의 흔적을 보았다. 누기인지 이름도, 기록도 남지 않았지만, 그 벽화는 말해준다. 어떤 이들은 그 먼 길을 걸어와 신앙과 문화, 그리고 흔적을 남겼다고. 그들은 스쳐 지나간 관광객이 아니었다. 진짜 여행자였다. 그리고 오늘, 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따라 다시금 묻는다. 나는 어디에 남을 수 있을까. 이 세상을 여행한 흔적을 실크로드와 둔황에 꼭 남겨보리라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