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에 1999년 5월에 입주를 했으니 햇수로 27년을 넘어서고 있다. 막내 녀석이 태어나고 이 집을 분양받아 왔으니 막내 녀석 크는 것과 시간이 같다. 오래 살긴 했다. 한 번쯤 갈아탔어야 했는데 ---
27년 동안 사람은 성숙해졌는데 아파트는 낡아갔다. 33평 공간에 살림살이는 점점 늘어갔고 편의장치들은 녹슬어 기능을 잃어갔다. 베란다 창문을 열라치면 삐그덕 거리는 마찰음이 들리고 화장실 변기와 욕조의 흰색이 누런색으로 시간의 더깨를 말한다. 거실마루의 표면이 벗겨져 듬성듬성 머리 땜빵하듯 보이고 전등도 깜박여 전구를 갈아야 한다.
며칠 전 냉장고도 냉동실이 고장 나서 새것으로 바꿨다. 가전제품이야 고장 나면 당연히 바꾸는 것이지만 집의 구조적 낡아감으로 인해 발생하는 불편은 어찌할 수 없다.
이사를 가던지, 전면적으로 리노베이션을 해야 할 시점이다. 아파트 같은 라인의 다른 집들은 대부분 새 단장을 했다. 22층 40세대가 있는데 절반이상의 집들이 입주할 때 같이 이사를 와 아직도 같이 살고 있고 나머지 절반의 세대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주인이 바뀌었다. 그 와중에 새롭게 수리를 하고 산뜻하게 단장을 하는 집들이 늘어갔다. 지금도 엘리베이터에는 1405호에서 한 달간 집수리를 한다는 안내문이 붙어있고 주인장이 일일이 같은 라인을 오르내리며 공사할 때 시끄러우니 양해해 달라고 인사를 하고 사인도 받아가셨다.
집수리보다는 10년 전부터 이사를 가자고 투덜대는 와이프의 성화가 있을 때마다 엘리베이터에 붙은 안내문에 적힌 수리업체 연락처에 어쩔 수 없이 눈길이 가고 있음을 눈치채고 있다.
이사 가는 것을 망설이는 이유는 일단 터 잡은 이곳에서 벗어나기 싫은 것이 가장 크고, 와이프 학교 직장이 망우리 고개만 넘어가면 되기 때문이다. 와이프 직장에서 가장 가까운 서울지역이다.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이 아파트를 팔아서 서울 다른 지역으로 갈 수 있는 처지가 못 되는 데 있다. 이곳 중랑구는 아파트 가격이 서울 전역 아파트 가격에서 최하위에 있기 때문이다. 팔아봐야 서울 다른 아파트로 가기에는 언감생심이다. 적어도 이사를 간다고 하면 새 아파트를 분양받거나 연식이 지금 살고 있는 집보다는 오래되지 않아야 하니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집을 수리해서 고쳐 쓰는 방법이 제일 현명하다는 생각이다. 리노베이션 비용도 만만치 않아 조금 더 보태서 아예 이사를 하자고 와이프가 강력 주장을 해서 팽팽히 맞서고 있는 상황이긴 하다.
이 팽팽한 신경전에 불을 댕긴 사건이 어제 벌어졌다. 세탁기가 있는 세탁실과 보일러실이 있는 공간의 문 손잡이가 망가져 문을 열 수가 없다. 이 손잡이 역시 27년 동안 한 번도 교체하지 않았으니 고장날만 한 연수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무리 낑낑거리고 문을 열려고 온갖 방법을 써도 꼼짝도 하지 않는다. 아파트 모든 문 열쇠가 달려있는 뭉치를 찾아 창문으로 넘어가 열쇠를 끼워 돌려도 요지부동이다. 세탁실 쪽 공간이 외부공간으로 설계되어 있어 세탁실 쪽에서 열쇠로 열어야 하는데 손잡이 안에 부속이 망가진 모양이다.
할 수 없이 관리실에 전화해서 수리전문 기사를 불렀다. 문 손잡이가 이렇게 망가지기도 쉽지 않다는 전문가의 궁금증에 "27년을 썼으니 이럴 수도 있겠지요"라고 얼버무리고 만다.
이렇게 또다시, 이사와 집수리의 갈림길에 기름을 부었다. "이제는 이사를 가야 해" "수리해서 사는 게 더 현명하지 않아?"의 선택을 해야 하는데 아직 확정 짓지 못하고 있다.
뭐 사실 결정짓지 못하는 이유는 역시 '돈'이다. 서울을 벗어나 경기도 변두리로 나가면 요즘 잘 지은 아파트로 갈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로 쫓겨가듯 가는 것은 아닌 것 같고 집수리를 하자니 역시 비용이 만만치 않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결정장애 속에 그냥 그냥 불편하면 고치고 마는 수준으로 버티고 있다. 사는 데는 크게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다 더 불편하면 둘 중의 하나 결정을 내리겠지. 나보다는 와이프의 선택에 달렸다고 은근 책임 회피를 해본다. 나는 이 정도 불편은 감수할 용의가 있기 때문이다. 돌 맞을 생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