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가 시각보다 무서운 이유

by Lohengrin

지구상에서 가장 잔혹한 동물을 꼽으라면 단연 인간이다. 사자나 상어의 사냥은 생존을 위한 본능적 행위이나, 인간의 살상은 그 범위를 훌쩍 넘어선다. 오늘날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그 참혹함의 정점이다. 무기를 힘의 도구로 삼아 타인을 억압하고 이득을 취하려는 파렴치한 행태는 인간이라는 종이 가진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다.


우리는 개별 인간의 이러한 잔인함을 억제하기 위해 사회적 합의를 거쳐 법과 제도를 만들었다. 힘의 독주를 막고 견제와 조화를 이루기 위함이다. 권한을 부여하되 반드시 책임을 묻는 시스템, 그것이 공동체를 유지하는 근간이다. 하지만 무소불위의 권력을 꿈꾸는 인간의 욕망은 늘 시스템의 틈새를 노린다. 이에 사회는 최후의 경고장으로 '사형'이라는 제도를 두어 생명 박탈이라는 극단적 처벌을 통해 공동체 운영의 엄중함을 선포한다.


기원전 6세기, 시칠리아의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인 아크라가스에는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사형 도구 중 하나로 평가받는 '팔라리스의 황소'가 있었다. 놋쇠로 만든 이 황소의 내부에 죄인을 가두고 밑에서 불을 지펴 천천히 태워 죽이는 장치다. 겉으로 보기에, 고통의 장면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 덜 잔인할 것 같지만, 이 기구의 진정한 잔혹함은 '소리'에 있다.


황소의 입 부분에는 정교한 금관 나팔이 설치되어 있다. 안에서 타 죽어가는 이의 처절한 비명은 이 관을 통과하며 흡사 황소가 성난 듯 울부짖는 소리로 변주되어 밖으로 울려 퍼졌다. 살려달라는 비명을 예술적인 소리로 치환해 즐기려 했던 인간의 비정함과 잔혹함이 서린 설계다.

왜 소리였을까? 여기에는 인간의 깊은 생태진화적 비밀이 숨어 있다. 인간은 공룡의 시대부터 포식자의 눈을 피해 밤의 세계로 숨어든 야행성 포유류의 후손이다. 어둠 속에서 생존을 결정짓는 것은 시각이 아니라 예민한 '청각'이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 하나에 생사가 갈렸던 조상들의 경험은 우리의 뇌 속에 '소리에 대한 원초적 공포'를 각인시켰다. 공포영화를 볼 때 화면보다 음향 효과가 더 큰 긴장감을 주는 것은 우리가 소리에 민감하도록 설계된 형질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 잔혹한 기구의 역사는 아이러니하게도, 놋쇠황소를 제작해 바친 기술자 페릴라우스는 이 기구의 성능을 시험하겠다는 폭군 팔라리스에 의해 첫 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그리고 훗날, 폭정을 일삼던 팔라리스 자신도 반란에 의해 자신도 놋쇠 황소 안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는 권력이 가진 무서운 속성을 보여준다. 타인을 고통스럽게 하기 위해 만든 틀은 결국 자신을 가두는 감옥이 된다. 사회 공동체가 사형이나 법적 규제 장치를 만든 본질적인 이유는 '힘센 수컷'의 폭주를 막기 위함이다. 권력이 사유화되고 남용될 때, 공동체는 시스템이라는 장치를 가동해 그 힘을 회수하고 처벌한다.


정치는 국민으로부터 잠시 위임받은 권한을 대신 집행하는 대리 행위일 뿐이다. 그러나 권력의 자리에 앉은 이들은 종종 그 힘이 본래 자신의 것인 양 착각에 빠진다. 국민이 쥐여준 힘을 칼날로 휘두르며 타인을 억압하려 들 때, 그들은 이미 팔라리스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권력을 잘못 사용한 자는 결국 자신이 만든 놋쇠 황소 속에서 비명을 지르는 나팔수 신세로 전락한다. 역사는 늘 증명해 왔다. 힘의 오용과 남용 뒤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책임과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운용하는 힘은 견제와 조화의 틀 안에 있는가? 아니면 누군가의 비명을 황소의 울음소리로 포장하고 있지는 않은가? 인간의 잔인함을 억제하기 위해 만든 법과 제도가 제대로 작동할 때, 비로소 우리는 '가장 무서운 동물'이라는 오명을 벗고 진정한 '사회적 존재'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형'이라는 단어는 계몽적으로라도, 경고성으로라도 남겨놓아야 할 법적 용어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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