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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Aug 20. 2020

저질의 '경계와 수준'을 경계하다

오늘 아침 부여잡은 화두는 '경계와 수준'입니다. 현재 우리 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정치, 사회, 경제의 양극화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기도 합니다. '회색지대'를 인정하지 않고 이분법적으로만 양분하는 관점에 대한 탄식이기도 합니다. 코로나 19 시국에 광화문에 모여 집회를 하는 몰상식한 주도자들은 마치 자기가 우리 사회를 구원하는 구세주인양 행세합니다. 그런 작자들을 입에 올리고 글로 쓰기가 거북할 정도입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몰상식의 수준도 생존의 범주화로 인해 파생된 행동이지 않나 생각됩니다. 집단 사회를 이루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철저히 '자기편'을 만드는 범주화가 필요했던 것이고 그렇게 '자기편'이라고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모이게 됩니다. 그것이 사는 길임을 본능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문제는 우리 사회에는 그런 사람들의 집단이 엄청 많다는 데 있습니다. 조화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회색지대를 인정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자기 범주만 살아남기 위해 행동하고 주장하는 사회는 지금의 우리 사회를 보는 것과 같이 분열과 파열과 상처만이 남게 됩니다. 결과는 말 안 해도 뻔한 길로 갑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다양성을 존중해야 하는 시기가 온 것입니다.

차이와 다름을 나타내는 접점. 이쪽일 수 도 있고 저쪽일 수 도 있는 곳. 인문학적으로 무수한 애매함과 융통성을 넘어서는 자리의 역할을 했던 것도 이 '경계'입니다. 지리적으로는 국경선일 수 있고 자연에서는 기후와 날씨를 구분 짓는 선으로도 표현됩니다. 이 경계의 접점은 융합을 이룰 수 도 있고 분열을 표시할 수 도 있습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의 현상으로도 비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서로 상반되는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과연 그러한 공간이 '경계'인지 되묻고자 하는 것입니다.


수없이 언어가 갖는 '의미의 장'에 갇힐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경계하고 있지만 이 경계는 주의를 의미하는 경계입니다. 두 경계가 만나 색깔을 혼합해야 할 상황이 발생합니다. 어떻게 융합될 것인지는 그 당시의 모든 조건에 따라 천차만별의 색깔로 드러납니다. 검은색으로 나타날 수 도 있고 총천연색으로 드러날 수 도 있습니다. 이 경계를 어떻게 조화롭게 합성하여 예쁜 색깔로 표현해내느냐는 전적으로 조합하는 주체에 따른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물론 자연의 법칙에 의해, 우주의 순환에 의해 합쳐지고 뭉쳐지는 것이 순리일 수 도 있으나 인문학 모든 현상을 놓고 볼 때는 인간 주체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만나는 경계의 선에서 과연 합리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학습되어 왔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나만 아니면 되고 내 가족이 아니면 되는 현실 풍토의 삭막함을 키운 것은 누구인가요? 사회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치부할까요?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은 역시 나로부터 출발합니다. 가톨릭에서 경계하는 '나 때문입니다'라는 경구를 되새겨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 경계에 선을 긋는 중요한 역할 중에 '사회의 범용 인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사회를 이끌어 가고 있는 공통된 가치관의 흐름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 공통된 가치가 무너진 사회를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정치가 그렇고 기업이 그렇고 우리 사회의 모든 시스템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바로 그 정도가 우리의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이 수준은 갑자기 올릴 수가 없습니다. 경계의 외연을 넓히는 일은 그만큼 어렵습니다. 오랜 시간 꾸준한 노력과 사회적 공감대를 가지고 올바른 방향이 어떤 곳인지 확실히 밀고 나가야 가능한 것입니다.


영국은 1215년 국민 대헌장을 통해 왕권을 제한하고 국민의 권익을 높였습니다. 그 시대에 우리 한반도는 어떠했을까요? 고려시대 무신정권이 한창 득세하던 시절입니다. 유럽은 900년의 세월 동안 갈고닦아 왔지만 우리는 겨우 해방 이후 75년의 세월을 거치며 유럽의 900년을 따라잡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어불성설입니다.


물론 유럽의 정치체제 및 경제체제가 더 우수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근대를 거치며 20세기를 주도하던 세계 조류에 동승해야 했던 우리의 현실은 따라잡기에 급급했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따라잡기 했던 행적조차 우리는 잘못했다고 인정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었던 상황에서 그나마 경제분야에서 비약적 따라잡기에 어느 정도 성공을 했습니다. 이제 따라잡기의 정점에 와보니 뒤도 돌아보게 되고 얼기설기 엮어 현상만 유지해왔던 체제의 형상들에 구멍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겉만 그럴듯했지 정신과 사상은 없었던 빈 그릇이었음을 이제야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낭만주의적 사회주의 인식에 휩싸인 인텔리들의 이중적 자기 합리화도 이 과정에서 나온 듯합니다.

20세기 인류사의 모든 쓰레기적 현상을 용광로처럼 녹여낸 민족이 또한 한민족입니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전쟁, 세기말적 종교의 난입 등 인류사 쟁점의 시험무대였음에도 모든 걸 융합시키는 저력을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끌고 어떻게 방향을 잡느냐에 따라 우리의 행로가 밝을 수 도 있고 어두울 수 도 있다는 결론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밝음보다는 어둠 쪽으로 기우는 것 같습니다. 사회를 주도할 리더가 없으며, 존경받는 종교인 하나 없는 종교계가 그렇습니다. 가장 신뢰받고 존경받아야 할 종교계가 권력 쟁취를 위해 시위를 하고 섹스스캔들의 추문에 휩싸이고 재산 부풀리기에 혈안이 되고 세습을 합니다. 모두가 구렁텅이에 있기에 누구를 탓할 수 도, 비난의 대상으로 삼을 수 도 없는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우리의 수준이자 경계의 한계입니다.


경계를 넓히고 수준의 외연을 확장하는 쪽으로 사회의 방향을 잡아야 합니다. 경계가 무엇인지, 어디까지인지조차 모르는 사회는 더 이상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현상의 본질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현상이 드러나면 본질을 보기보다 주변만 살핍니다. 시간이 지나면 본질은 온데간데없고 주변의 궤변이 본질을 대신합니다. 세월호가 그렇고 반일이 그렇고 조국, 박원순이 그렇습니다. 이 저질의 경계를 빨리 벗어나는 일은 다양성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이분법적 사고가 아닌 다름을 인정하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시간이 쌓이면 감당할 수 있겠으나 아직은 무리인 듯하여 안타까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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