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을 본다." 견지망월(見指忘月). 본질을 보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근원을 들여다봐야 하는데 말입니다. 의미는 근원을 들여다보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부수적인 용례에 지나지 않습니다. 단어의 뜻을 알면 의미가 이해되는 시스템입니다. 바로 브레인이 감각을 하고 지각을 하고 의식을 통해 생각으로 만들어내어 의미를 부여하는 순서와 같습니다. 이 순서를 따라가는 것이 근원을 추적하는 것이며 자연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한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인간 사회는 정말 무한대의 오묘함이 존재하는 아주 아이러니한 공간입니다. 아주 쉽게 정치권만 들여다 보아도 "어떻게 똑똑하다는 놈들을 모아 놨음에도 저 정도밖에 못하는지" 궁금해집니다. 왜 그럴까요?
하지만 정치인 모두가 본인 스스로는 최대로 열심히 한다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자기가 하는 행동 및 언사가 모두 국가를 위해, 국민을 위해 하는 것이라 확신한다는 겁니다. 밖에서 지켜볼 때에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행태들을 펼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 지지고 볶고 하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안과 밖의 이 차이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구한말 나라를 팔아먹은 오적들도 나름대로 대한제국을 살리기 위해 최고로 힘 있다고 생각되는 일본에 기대어야 다른 열강으로부터 나라를 구한다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일말의 부끄러움이나 죄책 감 없이 나라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모두가 최선을 다했다는데 나라의 운명은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왜 그럴까요? 어떤 모순이 작동해서 이런 것일까요?
저는 공동체는 생명체와 같이 살아 움직인다고 봅니다. 살아 움직이기에 어떠한 방향으로도 갈 수 있습니다. 좀 더 발전적인 진화의 진보로 갈 수 도 있고 뒤로 가는 퇴보의 진화로도 가능합니다. 바로 구성원들이 밀고 가는 추진력의 방향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그 방향을 잡는 것은 그 공동체의 우두머리 집단들이 대부분입니다. 동물 사회에서의 방향성은 생물진화이래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빠른 의사결정으로 인한 생존을 위해 본능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이 방향타를 쥐고 있는 집단의 도덕성 윤리성 그리고 리더십이 중요해지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인간사 회중 특히 한반도에서는 그나마 구성원중에 난 놈이라고 뽑아 리더를 맡겨 놓으면 이상하게 군림하려는 방향으로 변질을 합니다. 완장의 힘입니다. 권력의 맛입니다. 마약처럼 한번 맛보면 죽어야 끊을 수 있습니다. 마약에 취하지 못하도록 하는 사회의 제도적 장치가 없기 때문에 더욱 쉽게 빠져 듭니다. 마약에 취하면 자기는 사회와 국민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계속 최면을 걸 수 있습니다. 그렇게 믿게 됩니다. 자기는 밤 잠 안 자고 국민을 위해 나라를 위해 걱정하는데 괜히 시비 걸고 딴지 걸고 비난만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국민이 채워줬다는 완장도 차고 있겠다 권력에 허리 굽히는 가신들도 있겠다 칼을 한번 휘둘러 봅니다. 추풍낙엽으로 엎드립니다. 그래 내가 하는 것이 맞아, 내가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따라오라 합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보다 더 큰 동네가 강 건너에도 있고 산 너머에도 있었습니다. 그 동네에는 또 다른 리더들이 있습니다. 이쪽 동네 하고는 전혀 다릅니다. 산속 동네는 호랑이 잡고 늑대 잡는 기세로 물러설 줄을 모릅니다. 협상과 타협이라는 단어도 모릅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습니다. 시선을 넓혀 주위를 둘러보고 통합의 지혜를 발휘하지 못하면 한 치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모두들 국가와 국민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중구난방 갈피를 못 잡게 되는 것입니다. 힘들더라도 같이 모여 최대 공약수를 찾아내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나만 아니면 되고 나의 가족만 아니면 되고 부의 사다리, 권력의 사다리를 오를 때는 나여야만 되고 내 가족, 내 지인이어야만 되는 작금의 한국사회의 윤리성과 도덕성은 질 낮은 하수의 전형입니다. 돈이 지배하는 사회로 몰려가다 보니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눈씻고 찾아볼래야 볼 수가 없습니다.
생명에 있어 차별은 본질인 것이 분명합니다. 다름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차별이 생명에는 그대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시리아 내전으로 보호구역 천막에서 태어난 아이와 뉴욕 코넬대학병원에서 태어난 아이는 분명 '생명의 차별'이라는 자연현상에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차별은 거스를 수 없는 근본입니다. 그저 외면하거나 더 좋은 조건, 더 나은 신분을 위해 노력할 뿐입니다. 생명이 바로 우열의 경계에서 살아남은 것들의 집합입니다.
근본을 들여다보면 합일점이 보입니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지만 조금씩 양보하면 그래도 앙해를 할 수 있는 수준 정도까지는 동의할 수 있습니다. 인간사는 그런 것이 아닌가 합니다. 같이 살아야 하기에 조금씩 양보하며 사는 것, 상대가 조금 손해 보더라도 참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며 사는 것, 그것이 더불어 사는 세상의 기본이지 않을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