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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Nov 26. 2020

기억은 인연의 깊이만큼만 떠오른다

기억에 의존해 어젯밤에 들춰 본 예전 노트의 글자들을 떠올려 봅니다.


주말마다 듣던 강의를 적어놓은 노트 중에서 무작위로 집어 들었더니 5년 전 것입니다. 적혀있는 글자들을 되새김질해보고자 기억의 창고를 다시 열었음에도 창고가 비어있음을 알아챕니다. 새삼스런 일도 아니어서 당혹스럽지는 않지만 그래도 분명 열정을 가지고 집중해서 들으며 적었을 텐데 지난밤에는 완전히 새로운 글자로 다가섭니다. "내가 했음에도 한 일이 아닌 것"같은 노트 한 권의 글자들이 한 밤 잠에 머릿속을 휘젓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이 아침 다시 노트에 적혀있던 글자들을 떠올려보려 애써보았습니다. 그런데 머릿속을 맴맴 돌기만 할 뿐 단어가 되어 나오질 않습니다. 기억의 4단계 중 맨 처음 시작한 단어조차 떠오르질 않습니다. 집중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밤새 잠을 자며 기억도 잠을 재워버린 모양입니다. 아직 깨어나지 않은 걸까요?  노트를 펼쳐 단서를 찾기 전까지는 영원히 떠오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외워질 때까지, 장기기억에 각인될 때까지 공부하고 또 해야 함을 절실히 느낍니다. 외워져 말로 표현할 수 있기 전까지는 자기 것이 아니라는 말이 와 닿는 이유입니다.


메모 수첩이 중요하고 노트가 중요하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지나고 나서 기억을 더듬어 보아야 알게 됩니다.

하지만 수없이 반복되는 기억의 상실 속에서 잊히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기억입니다. '그대'라는 존재입니다. 어제 들춰본 노트의 내용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지만 그대라는 존재에 대한 기억은 생생합니다.


어떤 차이일까요? 연관성의 갈고리 숫자 차이일 것입니다. '그대'라는 단어에는 수없이 많은 연관어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니 보이고 만져지고 느껴지는 모든 것과 이어져 있기에 저녁식사 한 단어만 들어도 그대와 먹고 마시던 수많은 음식과 식당들이 줄지어 떠오릅니다.


하지만 어제저녁 스치듯 들춰본 노트에 적혔던 기억의 4단계에는 연관어가 거의 없습니다. 5년 전에 썼지만 기억나지 않고 떠올리지 못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합니다. 다행이라 위안을 삼아봅니다. 당연한 것이라 자위해 삼아봅니다.


기억의 저편은 속세의 표현으로 인연의 깊이일 수 있음을 알아챕니다. 척하면 떠오르는 '그대'의 이미지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인연의 고리와 깊이를 간직하고 이어왔기에 가능했던 것임을 말입니다.


기억하는 만큼 그대를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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