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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Dec 08. 2020

"빡빡 깎아 주세요"

지난 일요일 동네 미용실에 들러 머리 커트도 하고 염색도 했습니다. 흘러가는 세월은 어쩌지 못한다고 머리카락의 색깔이 점점 더 하얗게 되어 갑니다. 머리카락은 원래 흰색이 원형이라는데 위안을 삼아 봅니다. 흰색에 검은색의 멜라닌 색소가 입혀졌던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검은색을 덧칠하게 됩니다. 한번 칠해놓으니 습관처럼 반복해서 칠하게 됩니다. 성형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한번 하면 안 할 수 없게 만드는 중독 같은 겁니다. 성형외과 하는 친구 녀석이 밥 벌어먹고사는 이유라고 하는 것이 실감 납니다.


머리커트와 염색은 한 달에 한 번꼴로 합니다. 머리가 반곱쓸이라 조금만 길어도 지저분해 보이고 염색한 귀밑머리부터 하얗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일요일도 그런 이유로 동네 미용실 의자에 앉았습니다. 미용실 원장은 제가 다니는 골프 실내 연습장에 같이 다녀 알게 된 남자분이십니다. 사업수완이 좋아 저희 동네에서 미용실을 제일 크게 운영했습니다. 미용사도 5명에다 보조일을 하는 사람도 2명이나 두고 있었는데 지금은 규모를 줄여 예약제로만 손님을 받는 미용실로 영업스타일을 바꾸셨습니다. 코로나 19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는데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미용실 자리는 상가 분양을 받은 터라 월세를 내지 않고 있어 버틸 수 있다고 합니다. 오히려 예약제로 손님을 받으니 시간 활용하기도 수월하고 해서 본인한테는 더 좋은 기회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오랜 시간 단골손님을 확보하고 있어 가능한 영업방법이기도 합니다. 미용실내 남는 공간과 의자는 다른 미용사들에게 분양하듯 입점을 시킬 예정이라고 하니 공동 사무실 사용 아이디어를 접목해 위기탈출의 기회로 활용하고 있는 생존력이 돋보입니다. 제가 사는 동네는 아파트 촌임에도 사방 200미터 내에 미용실이 15개가 넘습니다. 경쟁이 심한 골목 시장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은 이런 발 빠른 환경 적응 능력을 넘어 시장을 주도하는 혜안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노하우가 있었음을 지난해 미용실에서 목도한 바 있습니다. 

지난해 이맘때쯤 머리커트를 하고 염색을 하려고 대기하고 있는데 제가 앉은 의자 너머 두 번째 의자에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총각이 들어와 안내를 받고 앉습니다. "머리를 짧게 깎아달라"는 것이 주문입니다. 거울 너머로 보니 요즘 학생들이 하고 다니는 머리 스타일 그대로입니다. 미용사가 묻습니다. "어느 정도로 짧게 깎을까요? 밑을 돌려 쳐 드릴까요?" 학생 왈 " 아니요 가장 짧게 깎으면 어떻게 깎을 수 있나요?" 일순간 미용사가 당황합니다. 짧다는 길이에 대한 공감이 형성되지 않은 겁니다. "빡빡 깎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제야 학생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간파가 됩니다.


그렇다고 외모로 보건대 불량 학생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미용실에 들어와서 행동하는 것과 말하는 것이 범생이임이 틀림없습니다. 미용사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묻습니다. "왜 빡빡 깎아 달라고 그러는데?" 학생 왈 " 고 3인데 공부 더 하려고요!" 그 한마디를 듣는 순간 제 머리를 염색하던 원장과 저는 거울을 마주하고 눈을 마주쳤습니다. 말을 주고받지는 않았지만 험한 세상을 넘어온 세월의 경험으로 인해 학생의 고민과 결의를 읽어내기에 그 한마디면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미용사가 살살 달랩니다. "빡빡 깎지는 말고 최대한 짧게 깎아 줄테니까 염려하지 마라"고 하며 2부 정도 남기고 깎기 시작합니다. (빡빡 깎을 때 2부, 3부하고 하면 70년대 중고등학교를 다닌 사람은 대부분 이해를 하실 텐데 ^^;;;;) 제 머리를 염색하던 원장이 고등학교 시절 눈썹까지 밀고 공부하던 친구들이 있었다고 한마디 합니다. 제 주변에는 머리를 밀고 공부할 만큼 독한 녀석은 없었습니다. 가끔 학교에 백호로 밀고 오는 녀석이 있긴 했지만 그것은 공부의 의지가 아니고 그저 반항이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리깡으로 짧게 깎는 머리라 금방 윙윙거리며 끝납니다. 짧아진 머리를 한번 쓰다듬던 녀석이 "괜찮은데요!" 하면서 쿨하게 한마디 합니다. 머리를 감고 와서는 자리에 앉지도 않습니다. "말릴 머리도 없는데요 뭐. 얼마예요? "


원장이 한마디 합니다. "학생 그냥 가. 공부 열심히 하고"


괜스레 제 눈가가 촉촉해집니다. 요즘 학생치고 머리를 밀고 공부할 만큼 당찬 녀석을 처음 보았기도 했고 그 쿨함에 또한 놀랐고 입시와 취업 전선의 어려움을 한순간 보는 것 같아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지난해 이맘때쯤이니 올해 수능에서 그 학생은 탁월한 실력을 뽐냈을게 분명합니다. 곧 우리 동네에도 서울대 수석 합격했다는 플래카드가 걸릴 것 같습니다. 아니 수석합격이 아니면 어떻습니까? 그런 결기를 가진 청년은 무엇을 하든 반드시 성공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머리 깎은 비용은 원장님의 쿨함으로 그냥 보낸 것 또한 우리 동네가 아파트 값은 싸도 살만한 동네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좋은 동네를 만드는 것은 역시 그 안에 살고 있는 구성원들의 몫임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제가 사는 동네는 중랑구 신내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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