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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Feb 16. 2021

저 벅 저 벅... 후다닥

아침 출근길 전철안.

왕십리역에서 2호선을 갈아타려고 환승을 합니다. 이른 시간임에도 제법 승객들이 플랫폼에 꽉 찼습니다. 전철이 들어옵니다. 플랫폼에 접어든 전철이 속도를 줄이고 스크린 도어에 맞추어 천천히 멈춰 섭니다. 이 순간에 눈은 스크린 도어 넘어 전철안 좌석을 재빨리 스캔합니다. 빈자리가 어디인지 찾고자 함입니다. 전철이 들어오는 방향을 따라 눈동자가 좌에서 우로 휙 돌아가며 목표된 자리를 찍습니다. "문이 열리면 우측으로 돌아  바로 옆에 있는 빈 좌석을 선점한다" " 아니 우측 빈자리는 옆에 뚱뚱한 아저씨가 앉아 있으니 좌측으로 방향을 바꿔 아가씨 옆자리로 가야지" 등등 짧은 시간 동안 빈 좌석에 대한 상황판단을 하고 발걸음의 방향을 정합니다.


물론 그나마  빈 좌석이 눈에 보였을 때 벌어지는 머리 굴림입니다. 전철이 플랫폼에 들어와 천천히 속도를 줄일 때 건너다본 전철 안에 빈자리가 없으면 눈동자 돌림을 포기하고 그냥 반대편 출입구 한쪽으로 가서 섭니다. 그나마 반대쪽 문은 계속 열리지 않을 테니 다른 사람 타고 내림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플랫폼을 들어오는 전철 칸에 승객이 한 명도 없습니다. "이게 무슨 일이지?" " 바로 전 역에서 출발하는 전철도 있었나?" 궁금증이 있었지만 전철 출입문이 열리기 전까지 잠시 여유가 생깁니다. 전철을 탑승하기 위해 줄을 서 있으나 빈 좌석 대비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문이 열립니다. 그래도 내가 찍어 둔 빈 좌석을 향해 발걸음을 옮깁니다. 우측으로 돌아 가운데 자리에 앉습니다. 빈칸이라 조급할 필요도 없습니다. 천천히 걸어 여유롭게 자리에 앉습니다. 휴대폰 안의 콘텐츠를 둘러보는데도 여유가 생깁니다. 이메일도 체크하고 어제 세상과 이별하신 백기완 선생님의 '뫼비나리'시 도 완독하며 명복을 빌어 봅니다. 그렇게 여유 속에 몇 정거장을 지나는 동안 빈 좌석들이 대부분 채워집니다.


그러다 문득 사람들의 발걸음이 빨라짐을 눈치챕니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후다다닥 뛰는 발걸음 소리도 들립니다. 빈자리를 찾아 뛰어가는 소리입니다. 빈 좌석은 몇 개 없는데 타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고 그 빈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이 붙었다는 겁니다. 여유가 사라진 발걸음 소리에는 조급함과 서두름과 승부욕이 겹쳐 있습니다. 이겨야 차지할 수 있는 자리로 보이기에 뛸 수밖에 없습니다. 이겨서 앉아야 출근길이 편안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빈 좌석에 투수가 투구하듯 가방을 던지고 뛰어가는 사람이 없길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요?

여유를 가질 수 있느냐 아니냐의 차이는 이렇게 극명하게 전철 칸의 빈 좌석을 두고도 벌어집니다. 제한된 것이 눈에 보이고 이 제한된 것을 차지하려는 사람이 많다는 인식을 하는 순간, 그 제한된 것을 차지하려는 인간 심리는 교묘하게 경쟁을 부추깁니다. 생존 본능의 발현이라고 치부해버릴까요?


사실 이 상황에서는 많은 변인들이 작동합니다. 몇 정거장 안 가는 사람은 빈 좌석이 있어도 앉지 않고 서서 가는 사람도 있을 테고, 몇 정거장 안 가지만 그래도 앉아서 체력 비축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뭐 치질이 있어 앉는 게 오히려 불편한 사람은 일부러 건강한 척 어깨 펴고 그냥 서있을 수 도 있습니다. 그리고 정말 생활운동을 통해 체중을 줄이고자 하는 사람도 굳이 앉아 가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지난밤에 잠을 설친 사람은 빈자리에 앉아 부족한 잠도 잠시 청할 수 있을까 하여 앉아가길 원하겠고, 두 손을 다 써가며 문자를 보내고 싶은 사람, 게임에 집중하고 싶은 사람도 빈 좌석에 휙 눈 돌리며 찾아가 앉을 겁니다.


이렇게 전철의 빈 좌석 하나에 앉을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상황은 시간과 혼잡함과 사람의 묘한 심리가 곁들여져 복잡한 현상들을 만들어 냅니다. 그저 여러 사람이 앉았다 일어나고 다시 빈자리가 되어 편안함을 제공하는 공간을 넘어 우리의 삶의 현장이 무수히 교체되고 교환되는 '순환의 빈 좌석'이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편안함의 쉼을 제공했을까요? 다리 아픈 어르신에게는 쉬어가는 자리가 되었을 테고 술 취한 취객에게는 따뜻하고 편안한 잠자리였을 수 도 있습니다. 그렇게 서민들의 희로애락이 '빈 좌석' 한켠에 묻어 있습니다. 


지금은 빈 좌석 하나 안 보이고 제 앞에 서 있는 사람의 코트자락만이 보입니다. 서민들의 여유는 사라지고 삶의 팍팍함이 대신한 듯하여 짠 한 마음이 듭니다. 이제 곧 내려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휴식을 위해 제가 앉았던 자리는 다시 '빈 좌석'으로 성향을 바꿀 겁니다. 누군가에겐 편안한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0분여 앉아 마음의 여유가 생겼음에 감사하며 따뜻한 철제 의자를 한번 쓰다듬어 보고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고맙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여유를 주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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