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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May 04. 2021

대충 적당한 무적의 레시피

출근길 전철 안에서 접속한 페이스북을 일견 하다가 눈이 딱 멈추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제가 가끔 찾아가는 페북 지인이신 한 분께서 '무적의 K 레시피'라는 한 문장을 올리시면서 다른 분 콘텐츠를 링크해 놓으셨습니다. '무적의 K 레시피'에는 "물 적당히 찰랑찰랑하게, 자작자작할 때까지, 양껏, 소금 설탕 엥간치, 딱 됐다 싶을 때까지 볶기"등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읽으면서 웃음이 절로 났습니다. "숫자로 표현하지 않고 감성으로 양을 측정하여 맛을 내는 민족이었구나"하는 생각이 드니 "우리는 참 대단한 민족임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계량된 숫자가 아니고 눈대중 비슷하게 대충 짐작할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양을 맞추고 시간을 맞출 수 있을까요? 대략 '두리뭉실 타법'이라고 정확한 레시피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틀리거나 맛이 없게 하는 레시피도 아닌 중간 정도 되는 레시피의 기법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런 대충 들이대는 도량형이 음식 만들고 요리하는데 주로 사용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뭐 집 짓는데 무적의 레시피를 들이댄다면 집이 무너져 내릴 테니 안 되겠죠? "까이꺼 뭐 기둥 대충 세우고, 지붕은 뭐 적당히 멋지게 올려!" 이렇게는 못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유독 음식 만드는 데에는 숫자가 배제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계량컵을 사용하여 정확한 물의 양이나 양념의 양을 정량으로 계산하고 조리시간을 분 단위로 측정해 레시피를 만드는 쪽으로 바뀌긴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대중들의 요리법에는 대충과 두리뭉실 과 손맛과 적당함으로 버무린 아주 이상야릇한 레시피가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청기와 장수의 요리법'은 누구나 음식을 만들 수 있다는 두려움을 배후에 깔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음식을 만드는데 똑같은 맛을 낼 수 있도록 음식의 양과 물, 양념의 양, 조리시간 등을 알려주면 자기의 존재 의미를 잃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겁니다. 이 청기와 장수의 폐쇄성 때문에 우리 민족의 과학기술은 세계 최하위를 기게 만들었고 현대 과학문명과 멀어지게 만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렇다고 우리 민족이 뼛속까지 청기와 장수는 아니었습니다. 과학을 주창하던 조선시대 세종께서도 도량형 통일을 위해 노력하신 것을 모두 알고 계실 겁니다. 조선시대 암행어사 임명시에는 마패와 함께 유척(鍮尺)이라는 놋쇠로 만든 자를 하사했습니다. 암행시 지방 관료들이 도량형을 잘 지키는지 감시하고 세금을 걷을 때 도량형을 큰 걸로 바꾸는지 단속하며 죄인을 매질하는 도구의 크기를 큰 것으로 못 들도록 재는 도구로 유척이 사용되었습니다. 도량형 측정을 넘어 백성의 안위를 살피는 성리학적 인문이 묻어나는 도구였던 것입니다.  


도량형까지 인문으로 끌고 와서 해석한 덕분에 우리 민족은 딱 거기까지 였습니다. 대포의 탄도를 계산하고 포신이 녹아 정확성이 떨어지는 것을 연구하기 위해 용광로의 불빛을 보고 온도를 계산하며 철의 용융점과 더욱 강한 강철을 만들어내는 데는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또한 화성으로 탐사선을 보내고 인공위성을 쏘아 올릴 때 우리는 그저 부러워했을 뿐입니다. 


"그 까이꺼 뭐 대충 하면 되지 뭐" "소금? 적당히 넣어 짜지 않을 만큼만" "갈치조림은 양념이 자작자작 밸 때까지 끓여!" 얼마큼 얼마만큼의 시간으로 어떻게 해야 한다는 정확성이 배제된 언어 커뮤니케이션 기능은 세상을 보는 시선의 정확도까지 떨어뜨린 것이 아닌가 합니다. 


"뭔 소리야! '적당히 넣으라'는 것은 이미 정확한 계량값을 초월한 언어적 표현이야"라고 주장한다면 할 말은 없습니다. "딱 보면 몰라? 한소끔 끓이면 되는데 그걸 못해?"


'한소끔'은 얼마만큼의 시간일까요? 한국말의 절묘한 표현일 수 있습니다. 숫자로 계량하기에는 무언가 애매모호하고 숫자의 허용범위가 그때그때 달리 적용될 수 도 있다는 겁니다. '한소끔'을 숫자 정량으로 표현해본다면 어떤 숫자를 쓸 수 있을까요? 3분? 5분? 아니면 10분? '한소끔'은 "어떤 기운 따위가 한차례 확 일어나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음식을 끓일 때, 끓는 상태가 한번 되도록 만들라는 표현인데 이 표현을 숫자로 표기하려면 사용하는 용기의 크기와 불의 세기, 또한 용기에 담긴 내용물의 양이 감안되어야 숫자로 쓸 수 있습니다. '한소끔'을 숫자로 계량화할 수는 있지만 너무 복잡하고 어려운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번 끓을 때까지의 숫자적 시간을 '한소끔'이라는 용어가 대신하고 있습니다.


삶을 사는 데는 대충 두리뭉실이 좋을 때가 더 많습니다. 적당하다는 삶의 지혜가 묻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양자역학으로 오고 인공위성을 띄우고 탐사선을 보내고, 아니 우리의 손에 있는 휴대폰을 켜고 알람을 맞추는 것조차 숫자의 정확성이 아니면 작동하지 않습니다. 까이거 뭐 대충 시간 표시가 휴대폰에서 깜박이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너무 세상을 인문의 시각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아니었나 되돌아봅니다. 두리뭉실 돌아가는 것 같은 세상의 내면과 속살은 사실 정밀한 디지털의 세계, 분자와 원자의 세계였음에도 우리는 겉만 보고 대충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그래도 까이거 오늘 날씨도 우중충한데 점심에는 자작자작하니 끓인 삼겹살 김치찌개나 먹으러 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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