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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Jun 24. 2021

통합이 안 되는 이유를 인간 본질에서 찾는다

보통 좌파와 우파, 보수와 진보로 정치성향을 양분합니다. 중간에 중도라는 영역을 끼워넣기도 합니다만 진영을 양분하여 자기편과 적을 구분합니다. 정치에서는 자기와 다르면 적으로 규정하는 듯합니다. 상대방을 이기고 찍어 눌러야 내가 산다고 생각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이분법적 사고가 확고히 지배하는 영역이 정치분야인 것 같습니다. 정치학적 균형과 시각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 생각해본 적도 별로 없습니다. 왜 우리는 이 이분법적 사고로 세상을 보게 되었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을 뿐입니다.


사실 세상일을 들여다보면 모든 것이 선택입니다. 잠에서 깨어 의식이 작동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선택의 시간도 동시에 시작됩니다. 양치질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샤워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 아침식사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 심지어 출근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조차 선택일 뿐입니다. 선택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는데 방점이 있습니다. 바로 선택은 행동의 동의어입니다. 선택했다는 것은 "여럿 가운데 골라 뽑았다"는 행위를 전제로 합니다. 다른 행위를 할 수 있은데 이것을 하고자 또는 취하고자 이 행동을 했다는 겁니다.


선택은 디지털의 세계입니다. 0 아니면 1입니다. 즉 하던지 하지 않던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조건이 아무리 많아도 결론은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 원리를 가져다 붙이지 않아도 세상의 결론은 항상 둘 중의 하나로 나아갈 뿐입니다. 이 선택의 결론은 명확합니다. 살던지 죽던지, 갖던지 못 갖 던 지 말입니다.


이 선택에는 책임과 의무가 따릅니다. 당연합니다. 선택하여 어떤 행위를 취하면 그 순간이 바로 또 다른 선택의 출발로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선택과 행동의 결과들이 이어져 삶이라는 선형적 시간에 무늬를 만듭니다. 내 삶의 무늬는 내가 선택한 결과와 행동의 산물입니다. 살면서 내가 선택한 모든 것들의 결과물이 지금 나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 선택의 기저에는 '의미의 장'에 갇힌 언어가 있습니다. 단어와 용어가 갖는 힘입니다. 생각은 inner talking입니다. 단어를 떠올려서 현상과 연결을 시켜야 실체가 드러납니다. 단어나 용어로 표현하지 못하면 생각조차 나지 않는데 비밀이 있습니다. 생각이 바로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제외한 동물들도 생각을 할 텐데"라고 할 수 있지만 인간적 시각의 착각입니다. 언어를 만들지 못한 동물은 본능에 의해 움직일 뿐입니다. 배가 고프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잡니다. 그것은 선택이 아닙니다. 본능입니다. 배가 고프지만 먹이가 있어도 먹지 않는 것이 선택입니다. 배가 고픈데도 먹이를 앞에 놓고 먹지 않을 수 있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습니다. 살을 빼야 한다는 가치가 먹는다는 가치보다 강하기에 음식을 먹지 않는 쪽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가치는 의미입니다. 의미는 언어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모든 사물에 이름을 붙입니다. 그래야 사물로서의 실체를 대상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의미를 입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가끔 아주 비열하게도 이 언어의 본질을 악용하여 프레임이라는 틀을 만들어 씌우기도 합니다. 사물에 이름 붙이는 이름표를 보이지 않는 형이상학적 현상에도 붙일 수 있다는 기발한 생각을 해냅니다. 프레임은 곧 단어와 용어로 작동합니다.  빨갱이라는 프레임이 그렇고 우익과 좌익이라는 프레임이 그렇습니다. 프레임에 대상을 집어넣어 버리면 간단명료해집니다.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너무도 확실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프레임을 씌우면 생각할 필요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렇다고 정의되어 있기에 그렇다고 믿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생각의 에너지를 최소화하려는 인간 본질이 엉뚱하게도 작동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다양성(diversity)을 인정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결과는 선택의 산물이지만 결과가 나오기까지 다양한 의견과 질문과 현상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고 존중해주는 것입니다. 다양성이 틀림이 아니고 다름임을 인정하는 틀입니다. 내 의견과 다른 의견도 있고 다른 생각도 있고 내가 선택한 것이 반드시 옳은 것만도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면 됩니다. "그렇게 인정사정 다 봐주고 언제 일을 진행할 수 있어. 밀어붙이고 가야지"라고 하더라도 한 번쯤 뒤돌아 반대의견을 반추해봐야 합니다. 그래서 내 선택을 혹시 수정하거나 잠시 멈출 수 있는지도 봐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선택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은 이분법적일지라도, 과정은 다분법적 숙고가 있어야 제대로 된 선택을 했다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와 함께 하고 있는 당신은 전 인류 중에서 제가 선택한 최고의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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