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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Sep 15. 2021

행복은 없다. 그저 느낄 뿐

삶의 목적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왜 새벽같이 일어나 출근을 하고 아웅다웅 부댖기며 살고 있는가? 왜 이렇게 돈을 벌고자 애를 쓰고 있는가 말이다. 행복하기 위해서? 


그렇게 갈구하는 행복이 뭐지? 잘 먹고 잘 사는 것? 사전적 의미인 "생활에서 기쁨과 만족감을 느껴 흐뭇한 상태"를 유지하고자 하는 것?


편안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 그래서 생존에 위협이 없이 안전하게 안정적으로 살아가는 와중에 즐겁고 기쁨이 함께하는 뭐 그런 상태를 행복이라 할 수 있다. (단어 하나에 정의를 내리기가 쉽지 않다. 평소 아무 생각 없이 용어를 써왔다는 뜻이다. 정말 "X도 모르고 살았구나"를 실감하는 아침이다)


왜 이렇게 행복이라는 단어 하나 정의 내리기가 어려울까를 곰곰이 생각해본다. 자연에 없는 인간의 느낌과 감정의 표현이기에 그렇다. 실체가 있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인간의 감각과 느낌과 정서로 표현되는 추상적 개념과 의미이기에 글로 옮기기가 이렇게 어려운 것이다.


행복이라는 단어 하나 표현이 이렇게 어려울진대 소위 '깨달음'이라는 것, '신'이라는 것을 표현해 내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것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선종에서는 불립문자(不立文字), 깨달음은 언어나 문자에 의지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다고 한다. 정말 깨달은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의미이다. 인간의 언어로 표현해 낼 수 없어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는 뜻이다.


자연에는 의미와 개념이 없다. 의미와 개념은 인간이 부여한 것이다.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호모 사피엔스가 자연을 보는 눈을 장착하고 인간적 의인화로 자연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자연을 인간의 눈으로 오염시킨 것이다. 아니 자연은 그대로인데 '그렇다고, 그럴 것이다'라고 지레짐작하고 개념과 의미의 딱지를 붙이기 시작했다. 자연에 느낌과 감정을 불어넣었다. 인간의 의지대로 자연이 만들어졌다. 사회가 만들어졌다. 국가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시스템 안에 스스로 갇혀 버렸다.

산 위에 보이는 바위조차 의인화의 대상물이 되어 버렸다. 거북바위, 남근바위, 코끼리바위, 버섯바위 등등 이름을 붙여 감정의 대상으로 끌어들였다. 풍화작용으로 토르(tor) 바위가 형성된 사실은 감춰지고 바위에 감정과 느낌이 물들게 된다. 자연을 자연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인간의 의식 작용이다.


반려동물에 대한 의인화 현상도 마찬가지다. 반려견도 사람과 같은 감정과 의식이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한다. 심지어 사람보다 낫다고 칭찬을 받는 반려견도 있다. 심부름도 하고 다친 주인을 위해 사람을 데리고 오는 개도 있다. 그런데 사실 모두 의인화 현상이다. 물론 그런 행동을 하는 개들이 있다. 그렇지만 인간의 감정과 같은 의식으로 그렇게 동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과 비슷한 행동을 한다고 의인화해서 개를 보는 인간의 시선만이 있을 뿐이다. 반려견들이 야생 들개가 되어 몇 개월만 자유롭게 되어도 먹고살기 위해 양계장을 습격하여 닭도 잡아먹는다. 


우리는 본의 아니게 세상에 나와 존재로서의 형상을 획득하는 순간, 인간들 사이의 관계로 세상을 보게 된다. 그 안에서 느낌이 생기고 감정이 만들어지며 언어를 배워 개념과 의미를 부여하여 사물을 만나게 된다. 끊임없이 생각을 다른 것에 투사를 하여 의미를 찾는다. 그래서 문화가 만들어지고 윤리와 도덕이 형성되며 사회의 정서까지 뜬구름처럼 만들어진다. 그래야 사람이 모여있는 군집 사회가 유지될 수 있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임에도 자연에 없는 것을 끊임없이 찾고 추구한다. 욕망에 끝이 없는 이유이다. 끝이 없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영원히 닿을 수 없지만 시지프스의 바위처럼 굴리고 간다. 자연을 벗어난 원죄다.


이 원죄의 시선을 잠시 돌릴 수 있는 기회가 자연과학을 접하는 일이다. 자연과학은 예외적으로 인간의 감각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에 있는 자연의 데이터를 보여준다. 자연과학은 인간적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별과 바위와 꽃과 사람에 대한 사실을 규명하는 일이다. 객관적 사실을 관측과 정밀한 측정과 예측을 통해 밝혀내는 일이다. 인간의 감정과 의인화가 끼어들 틈이 없다. 그래서 자연과학은 위대하다.


인간을 피해 깊은 산사로 들어간들 생각 자체까지 놓고 갈 수는 없다. 생각 자체가 언어로 인하여 만들어지고 물들어 있는데 어찌 가능하겠는가? 그래서 가끔은 눈이라도 질끈 감고 숨 쉬는 호흡 자체만을 들여다보는 단순함에 빠져볼 일이다. 1분도 호흡을 지켜보기 힘들지만 조금씩 시간을 늘려보자. 그리고 눈을 뜨면 눈앞의 세상이 다시 보이게 될 것이다. 내가 보고 싶은데로 보이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가끔은 이렇게 보이는 데로 보이는 세상도 있음을 알게 될 터이다. 그러면 지금 이 시간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조금이나마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감사하다. 지금 이 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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