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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Oct 14. 2021

옆 건물 훔쳐보다

사무실 도착시간 6시 55분. 보통 7시 전에 출근해 자리에 앉습니다. 사무실에서 제 자리는 코너스위트에 해당합니다. 자리 오른쪽과 뒤쪽이 창문이라 해가 뜬 날에는 오른쪽 창으로 햇살이 비춰 들어오다 뒤쪽 창으로 옮겨갑니다. 오늘은 구름이 해를 가리고 있어서 사물의 윤곽만을 서서히 선명하게 하고 있군요.


컴퓨터 부팅을 하고 출근길에 점검을 하긴 했지만 회사 이메일 다시 확인하고 당직자들이 새벽에 고생해서 준비한 회사 관련 아침 기사들도 일견 해봅니다. 그리고 당장 해야 할 업무가 없다고 판단되면 잠시 이렇게 편지함을 엽니다. 모드를 바꾸는 일은 빨리 전환되지 않습니다. 예열이 필요합니다.


창밖도 한번 주시하며 건물 아래 도로를 지나는 차량행렬도 쳐다봅니다. 가로수로 서 있는 은행나무의 키높이도 힐끗 쳐다봅니다. 괜히 머그잔에 내려놓은 진한 에스프레소 커피도 한 모금 입에 담아봅니다. 아침 글의 시작을 무엇으로 할까 고민하는 현장입니다.


그러다 문득 오른쪽으로 내다보이는 옆 건물을 쳐다보게 됩니다. 제 사무실 하고는 100미터 정도는 떨어져 있지만 건너편 건물의 창문에 보이는 여러 현상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옆 건물은 아직 출근들을 안 한 모양입니다. 불 켜져 있는 창문이 거의 없습니다. 복도를 비추는 조명만이 창문 너머 건물의 층수를 헤아리게 만듭니다. 창문마다 블라인드가 드리워져 있어 내부가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블라인드가 올라가 있는 층은 가만히 보니 비어있습니다. 사대문 안쪽에 있는 건물인데 이렇게 비어있는 사무실이 많습니다. 창문에 다가가 자세히 보니 비어있는 층이 한 층이 아닙니다. 2개 층 정도가 비어 있습니다. 새로운 회사가 입주하기 위해 비워놓은 것일 거라 생각해 봅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있는 건물 같은 층 옆 공간도 비어 있은지 2년은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공실이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경기가 어렵다는 것의 반증일까요? 임대료가 비싼 이유도 있을 것이고 복합적인 현상이겠지만 비어있는 공간만큼 누군가의 가슴도 비어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착잡해집니다.

옆 건물을 쳐다본 김에 한참을 바라다봅니다. 각 층의 창문마다 그 창문 너머에 있는 사람들의 군상과 마음을 엿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뭐 염탐을 하거나 훔쳐보는 정도는 아닙니다. 건물과의 거리도 있고 코팅이 되어 있는 창문들이라 안이 들여다보이지도 않습니다. 다만 창문가에 놓인 여러 물건들은 분별이 가능합니다. 대부분 창문에는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습니다. 그래도 몇몇 창문에는 작은 화분들이 놓여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잡동사니 물건들이 쌓여 있는 창문도 보입니다. 창고인 모양입니다. 


그렇게 창문에 보이는 현상만으로도 창문 너머에 존재하는 사람들과 공간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블라인드가 내려와 있는 너머에는 치열한 경쟁과 일에 몰입해야 할 뜨거운 열기가 가득할 것 같습니다. 좀처럼 여유가 없을 듯합니다. 저 내려와 있는 블라인드는 영영 걷히지 않을 듯합니다. 바라보고 있는 내가 더 갑갑해집니다. 출근하는 누군가가 저 블라인드를 한번 올려봐 주기를 기대하며 간간히 창밖을 다시 쳐다보게 됩니다. 그나마 창가에 초록의 잎들을 키우고 있는 작은 화분이 나란히 놓인 곳을 발견하고 안도하게 됩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회색의 건물벽에서 유일하게 보이는 초록색입니다. 아마 그 창가에 자리를 하고 계신 분은 감성 충만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화분이 있으니 블라인드도 당연히 올라가 있습니다. 생명을 아는 사람입니다. 여유를 아는 사람일 겁니다.


이렇게 창밖에 보이는 옆 건물의 창문을 바라보며 아침 글을 쓰고 마무리를 합니다. 그리고 작은 화분 하나 보이는 그 창문 너머에 계신 분에게 무언의 텔레파시를 보냅니다. 오늘 하루도 잘 보낼 것이고 초록의 생명이 커갈 수 있도록 지켜줄 것을 당부해봅니다.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에, 아무것도 아닌 현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감정을 담는 것이 글 쓰는 일의 시작입니다. 이제 30분의 글쓰기를 끝내고 다시 모드를 바꾸어 업무에 충실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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