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hengrin Oct 18. 2021

가을의 실종

창밖은 아직 늦여름인 것 같았는데, 아니 조금 더 인심 써서 가을이었다고 인정해줄 수 도 있었는데 공허한 착각으로 돌변해 버렸다. 기온은 계절을 건너뛰어 바로 겨울의 초입에 세상을 던져놓았다.


이럴 수는 없다. 아직 가로수 은행나무는 초록의 이파리를 그대로 달고 있는데, 아직 코스모스 만개해 있고 백일홍이며 국화가 흐드러지게 피고 있는데 말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감기 들지 않고 몸살 나지 않으려고 아직 세탁소를 다녀오지도 않은 패팅을 만지작 거리고 캐시미어 재킷을 걸쳐 입어야 한다. "그래도 아직 10월 중순이고 가을"임을 주장하며 얇은 카디건 정도 걸치고 나왔다가는 개 떨듯이 떨게 되는 현실의 기온과 맞닥트려야 한다.


이렇게 급격히 일교차가 발생하는 환절기가 되면 나는 특별히 조심한다. 찬바람에 목이 노출되어 있으면 편도선이 약해서 금방 이상 증상이 발현해 온 경험이 있는지라 목을 따뜻하게 하는 목도리 정도는 환절기에 항상 백팩에 넣고 다니곤 했다. 내 경우는 코로나19로 마스크를 항상 착용해야 하는 지난해부터는 그나마 마스크 덕을 보고 있다. 마스크를 쓰고 있으면 호흡이 불편하긴 해도 차가운 공기를 목으로 바로 넘기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장점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찬 바람이 목으로 바로 들어오면 입안과 목의 점막이 금방 말라 바이러스의 증식을 쉽게 하는데 마스크 덕에 입과 코의 온도를 유지시키고 호흡에서 나오는 수증기를 가두는 역할을 하기에 바이러스나 인플루엔자의 침투를 막는 방어막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기온의 변화가 서서히 다가와야 신체도 적응을 하고 옷의 두께도 조절하여 체온 유지를 맞춰나갈 텐데, 이번 추위는 갑자기 계절 하나를 건너뛰어 버렸다. 적응의 동물인 인간이야 옷을 챙겨 입고 화석연료를 때서 열을 내고 난방을 하여 기온 편차를 줄일 수 있겠지만 차가운 기온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저 은행나무 가로수는 어떻게 견디고 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기온의 하강에 따라 삼투압도 서서히 종료하여 잎의 색깔도 바꾸고 결국 대지로 잎을 내려놓을 시간이 필요한데 그 과정을 생략이라도 해야 할 것인가 말이다. 초록의 이파리를 그냥 대지로 떨어뜨려야 할지 고민을 할지도 모른다. 잎의 색깔이 문제가 아니고 당장 본체인 줄기가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기온이 뚝 떨어져 영하로 내려갔음에도 잎을 달고 있다가는 물관이 얼어 나무의 생존까지 문제가 될 텐데 어떻게 응대를 할는지 기온의 변화와 가로수 잎의 색깔 변화를 지켜보면 재미있을 듯하다.


바깥 풍경을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그런가 보다 출근하니 벌써 천장 위 난방기가 가동되어 있다. 지금 바깥 기온이 영상 3도 정도이니 난방기를 켤만하긴 하다. "그래도 아직 난방기를 켤 때가 아니지 않은가?" 반문하게 된다. 차가움, 아니 추위를 인정하고 싶지 않다. 차라리 그냥 의자에 걸쳐져 있는 카디건을 덧입는 것으로 차가움과 맞서고 싶다. 아직 내 머릿속에는 가을이 오지도 않았고 지나가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을을 붙잡으려다 감기 걸려 누워있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아직 이용의 "잊혀진 계절" 노래도 듣지 않았다. 그날이 오려면 아직 2주일이나 더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이렇게라도 사라진 가을을 붙잡고 싶고 되뇌고 싶은 모양이다. 가을이 추억으로 사라진 사진으로 존재하게 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잊혀진 계절로 올 가을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까닭이다.

작가의 이전글 비발디가 '사계'를 다시 쓴다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