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hengrin Oct 20. 2021

나쁜 놈 중에 덜 나쁜 놈보다 좋은 놈을 뽑고 싶다

"역사에 지름길은 있어도 징검다리는 없다"라고 한다. 시간을 줄일 수는 있어도 빼먹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게 그건가? 아니다. 전혀 다르다. 설사 징검다리를 통해 건너갔다고 해도 반드시 건너뛴 부분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 역사다. 


역사란 무엇인가? 인류의 시작이래 수많은 사상가와 철학자들이 고민하고 논의한 부분을 다시 논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오늘 현재 신문 지면에서 펼쳐지고 유튜브에서 오르내리는 드라마틱한 현상만 봐도 감당하기 힘든 혼돈을 경험할 수 있다. 오늘 저 현상이 쌓이고 쌓여 역사의 지층으로 변해갈 것이다. 그 지층에 한 개인으로서의 역할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한 세대를 같이 살아온 원죄로 인하여 먼 미래에 지금의 현재를 과거로 평가하는 세대가 보는 눈에 '저때는 저랬구나'라고 비칠 때가 되어야 그 지층 속에 같이 묻혀 있는 존재의 흔적으로 재생될 것이다.


"저 세대 사람들은 어떻게 저렇게 멍청할 수 있지?" "저러고도 사회와 국가가 굴러갔다는 말이야?" 이런 부정적 평가를 받을 수 도 있겠고 "그래도 대단한 거 같아, 동북아의 변방에서 쬐그마한 나라가 사라지지도 않고 살아남은걸 보면" "K 콘텐츠라는 걸로 그 당시 세계 문화의 주목을 받았다는 게 엄청나지 않나?"


역사는 선택이다. 어떤 놈을 뽑아 시대의 리더로 세우고 어떤 시각으로 세상을 볼 것인지조차 선택이다. 이 선택은 개개인이 하는 것이지만 모여서 사회가 되고 국가가 되면 이 선택이 방향성을 갖고 방향성은 힘을 갖게 된다. 이 힘의 방향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가 그 국가가 미래를 향하여 갈 운명이 될 것이다. 명확한 방향성을 가진 사회가 되어야 한다.


현장에 있어보지 못한 자는 항상 원론만을 말한다. 현장은 상상과 생각의 공간이 아니다. 현장은 말 그대로 죽기 아니면 살기의 선택만이 있는 피비린내 나는 곳이다. 우리가 매일 보고 듣는 정치판의 현장이 바로 이 현장이기에 적나라한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 왜 화합과 타협과 관용이 통용되지 않느냐고? 피비린내 나는 현장에서, 죽기 아니면 살기의 현장에서 화합이나 관용이 통용될 것으로 보는가? 오직 살아남는 자만이 승리하는 자이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사기와 배신이 판을 친다고 해도 상대방을 이기기 위한 수단으로 작동하면 전략이 되고 전술이 되는 곳이 현장이다. 우리는 매일 그 살벌한 현장을 목도하고 있다. 신문지면과 방송으로, 그리고 저 끝 모를 유튜브의 중계를 통해 양산되는 왜곡과 폄하와 조롱을 보고 자극되어 흥분하고 있다.

포탈 플랫폼 사이트들이 가장 좋아하는 현상이 바로 양극화 현상이라고 한다. 끝없이 상대방을 비하하고 자극하는 콘텐츠를 생산하는 것은 물론 자기들의 영역을 확보하기 위한 콘텐츠도 계속 만들어내기 때문에 폭발적으로 콘텐츠 유통을 시키기 때문이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탄 듯한 중도층들은 그저 지켜보기만 할 뿐 콘텐츠 생산과 유통에는 별 기여를 못한다.  플랫폼 사업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중간에 서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사회가 양 극단으로 달려갈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역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물타기가 되어 결국은 중도의 선에도 결정된다. 세상 이치가 참으로 그러하다. 당시 분위기에서는 마치 폭발하듯 달려가고 부서지고 무너질 것 같지만 나중에 보면 그저 그런 쪽으로 결론지어지고 흐지부지되어 있다. 그렇게 유유히 강물 흐르듯 흐르는 것이 역사의 과정이다.


이 흐름은 세상의 현상 하나하나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원자력 발전에 대한 세상의 시각만 봐도 그렇다. 마치 원전은 없어져야 할 나쁜 놈의 시각으로 봐왔는데 에너지 현실은 원전을 배제하고는 탄소중립으로 갈 수 없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대변동'이라는 책에서 "좋은 해결책과 나쁜 해결책을 두고 택하는 상황이 아니므로 나쁜 대체에너지중 어느 것이 가장 덜 나쁜가를 물어야 한다. 원전사고의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을 화석연료의 공기오염으로 매년 수백만 명이 사망하는 확실성과 비교해야 한다."라고 했다. 파이낸셜타임스도 "탄소배출을 줄이기 위해 일시적으로 원전의 위험을 감수할지, 더 많은 화석연료를 사용할지 선택해야 한다. 지구온난화를 2도 이하로 유지하려면 최고의 에너지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덜 나쁜 전력 구성을 선택해야 한다. 원전을 과도기 옵션으로 써야 한다."라고 했다. 에너지에 대한 명괘한 선택의 시각이 아닌가 한다


우리 사회도 곧 에너지 현상의 고민까지는 제쳐두고 정치판에서 나쁜 놈들 가운데 덜 나쁜 놈을 선택해야만 하는 순간이 오고 있다. 어떤 놈이 덜 나쁜 놈일까? 좋은 놈은 정말 없는 것일까? 좋은 놈들은 왜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숨어있다면 이제 모습을 내보여도 되지 않을까? 아니 곁에 있는데도 우리가 못 보고 있는 것일까? 선택의 순간이 올 때 덜 나쁜 놈보다는 좋은 놈을 뽑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사진은 '침묵이자 수다'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