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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Mar 09. 2020

전희

사무실에 출근하면 규칙적으로 하는 것이 있습니다. 겉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고 책상 위 컴퓨터의 전원을 켭니다.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부팅되는 동안 사무실을 한 바퀴 돌며 먼저 나온 직원들에게 인사를 합니다. 저희 사무실은 나이 순으로 일찍 나오는 경향이 있습니다. 매일 바뀌는 당직자를 빼면 그렇습니다. 보통 네 번째 출근자가 되는 게 제 순서입니다. 인사를 하고 탕비실로 가 포트에 물을 붓고 머그잔에 블랙티 잎을 조금 집어넣고는 물이 끓을 동안 사무실에 놓인 몇 안 되는 화분에 물을 줍니다. 매년 식목일을 전후에 창가에 작은 화분 키트 한 두 개씩을 키웠는데 지난겨울 어느 날 갑자기 청소하시는 분께서 모두 치워 버린 후 창가 화분 키우는 것은 접었습니다. 대신 큰 화분에 놓인 유도화 나무와 행운목 화분 3개에 물을 주는 것으로 일상의 루틴을 채우고 있습니다. 사실 화분에 물을 준다는 것이, 전날 마신 머그잔과 1리터짜리 물통에 남아 있던 물을 화분마다 돌아가며 부어주는 정도입니다.


창가에 화분 키트를 키울 때에는 매년 다른 꽃들을 키우고 커가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창가 작은 화분에서 나름 꽃도 피고 씨앗도 받았습니다. 아직 제 책상 위에는 3년 전 받아놓은 '바질'씨앗이 아직도 잠깨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작은 화분들이 없어진 이후로 잔재미가 없어지긴 했습니다. 유도화나 행운목 같은 큰 화분들은 실내에 있느라 꽃피는 것을 본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햇빛을 충분히 받질 못해 개화하기에는 에너지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저희 사무실에 있는 행운목 한 그루는 꽃을 세 번이나 피운 전력을 자랑합니다. 물론 저희 사무실에 이사온지가 20년은 족히 넘었기 때문이기도 할 겁니다. 그런데 이 행운목은 사무실에 들어올 때 온전한 나무형태로 들어온 것이 아니고 나무에서 옆으로 삐져나온 가지 하나를 꺾어 다른 화분에 옮겨 심었던 녀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여 년을 살아남더니 향기에 취할 만큼의 꽃을 3번이나 피웠습니다. 그런데 가장 최근에 꽃을 피웠던 시기가 5년을 넘긴 듯합니다. 더 이상 꽃을 피우길 거부하는 것일까요? 꽃피는 것을 보려면 햇빛이 드는 쪽으로 옮겨야 할 텐데 사무실에 그런 공간이 없어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래도 이 열악한 조건에서 세 번씩이나 꽃을 피웠었는데 최근엔 꽃을 안 피운다는 것은 행운목이 나이 들어서 일까요? 꽃 피울 조건을 못 만들어준 저의 부족함이 최대의 원인일 겁니다. 


유도화도 저희 사무실에 입양 온 지가 15년은 족히 넘었을 텐데 아직 한 번도 꽃피는 모습을 보여주질 않습니다. 저희 집 베란다에도 유도화가 있는데 햇빛이 많이 드는 남향에 있는 관계로 매년 꽃들을 피워내고 있는데 말입니다. 역시 꽃을 피우는 데는 햇빛에너지가 절대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어두운 날이 많아야 꽃을 피는 식물도 있지만 말입니다.


그렇게 화분마다 꽃을 언제 피울 건지 물으며 물을 주고 탕비실에 돌아오면 물이 끓어 있습니다. 머그잔에 물을 붓고 자리로 돌아오면 컴퓨터가 부팅되어 있습니다. 회사 메일을 체크하고 당직자가 작업한 아침 기사들을 일견 하고는 개인 편지함을 열어봅니다. 답변할 메일들이 없으면 편지 쓰기 백지 화면을 띄웁니다. 백지위에 일상의 루틴들을 채워나갑니다. 


그렇게 매일 아침 편지를 쓰고 발송하면 본격적인 회사일을 시작할 준비를 마치게 됩니다. 이제 본업에 충실할 '요이~땅'할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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