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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Nov 29. 2021

본다는 것의 당혹스러움

나는 지금 보고 있다. 컴퓨터 화면을 보고 있다. 하얀 화면에 검은 글자가 하나씩 새겨지고 있음을 보고 있다. 눈동자는 새겨지는 글자를 따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조금씩 조금씩 초점을 맞추며 움직이고 있다. 본다는 현상의 현장이다. 이것이 리얼리티다.


그런데 이 본다는 현상의 리얼리티를 생물학적으로 들여다보면 '황당하다'라고 한다. 이것은 무슨 황당한 말인가? 보이는데 황당하다니?


본다는 현상은 내 시선의 각도가 정면을 응시할 때, 수정체(lense)의 두께를 조절하여 망막 뒤편의 중심와(fovea)에 초점을 맞추어 사물을 선명하게 인지하는 것을 말한다. 선명하게 보기 위해서는 두 눈의 시선을 한곳에 집중해야 한다. 집중을 한다는 것은 시선을 고정해야 가능하다. 중심와에서 조금씩 각도가 벗어나면 희미해진다. 초점을 벗어나 각도가 10도만 멀어져도 눈앞의 사물이 희미해져 불완전한 형체만 인식된다. 눈앞에 볼 수 있는 각도가 180도로 넓게 보일 것 같지만 착각이다. 초점을 맞추어 정확히 볼 수 있는 1도 각도 이외에는 기억된 상징으로 이미지를 채워 넣는 것이다. 선명하게 보기 위해 끊임없이 눈을 깜박이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눈동자를 돌린다. 미세하게 끊임없이 움직이는 눈동자를 의식하지 못할 뿐이다. 


본다는 리얼리티 행위의 진실은 1도 각도의 선명한 초점 이외에는 나머지는 허상을 보고 있다. 선명하게 보이지도 않는데 보이고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풍광에 속고 낙엽 지고 바람 부는 현상의 감정까지 덧붙여 자연에 의미를 입혀서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

'본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하게 만드는 행동을 유발하게 하는 행위일 뿐이다. 호랑이, 사자에게 잡아 먹히던 피식자의 운명이 처절히 내재되어 나타난 현상이다. 포식자가 아닌 피식자 동물들은 포식자를 보면 도망가야 한다. 동물의 왕국에서 볼 수 있는 리얼리티다. 인간은, 보면 도망간다는 리얼리티에 하나의 기교를 덧붙여 세상을 인간 중심으로 리셋시킨 존재로 재탄생했다.


바로 '보면 한다'는 흉내다. 인간은 타인이 하는 것을 보는 순간 바로 흉내 낼 수 있다. 보자마자 흉내 낼 수 있는 종은 오직 호모 사피엔스뿐이다. 그래서 성공한 유일한 종이다. 인간종 속에는 어떤 행위나 동작에서 남들보다 뛰어난 것을 만들어내거나 수행할 수 있는 천재들이 나올 수 있는데 이들의 우수한 능력을 대부분 사람들이 따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완력으로 힘이 셀 수 도 있고 지능적으로 우수해 힘을 능가할 도구를 만들 능력을 가진 자도 있다. 그 주변으로 모여야 생존을 보장받는데 유리하다. 그것도 타인의 눈치를 보면서 따라 하고 모여든다. 여기서 도덕과 윤리가 등장하고 권력이 생긴다. 따라 하는데도 타인의 시선을 조심스럽게 의식해야 한다. 그래야 사회에 다툼이 없다. 군집생활을 하면서 이 사회적 시선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 사회적 시선이 비난과 증오로 바뀌면 가장 큰 공포가 된다. 공포의 변형이다. 사회적 시선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극단적으로 자살까지 하는 현상을 종종 목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시 본다는 행위를 들여다보자. 수정체를 통과한 빛이 망막에 들어오고 그 빛의 파장이 시신경을 타고 브레인의 외측슬상체(LGN ; Lateral Geniculate Nucleus)를 지나 시각피질로 전달되고 감정의 중추인 편도체(Amygdala)와 전전두피질(VLPFC)까지 관여되면, 본다는 것과 정서와 인지와 언어가 종합된 현상으로 드러난다. 그럼에도 본다는 현상의 각각의 단계들을 떼어놓고 보면 아무런 연결점과 연관성도 없이 각자의 역할만을 할 뿐이다. 수정체는 빛의 강도에 따라 두께를 얇게 했다가 두껍게 했다가 할 뿐이고 시신경에 닿은 빛은 전압 펄스로 바뀌어 브레인의 시각피질로 전달될 뿐이다. 본다는 황당함은 여기서 등장한다.


본다는 것은 한순간 한 점을 보는 것만이 실재다. 내가 관심 있는 것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집중한다. 나하고 관계없는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물음을 끊임없이 물어야 하는 이유다. 어떤 것을 어떻게 보느냐에 대한 시선의 눈높이가 결국 그 사람의 행동을 만들고 존재를 만들기 때문이다. 그저 보인다고 다 보이는 것이 아니다. 실재를 들여다봐야 한다. 내가 지금 관심을 갖고 시선을 고정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살펴보고 들여다봐야 한다. 그것이 결국 내 모습을 만들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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