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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Apr 25. 2022

마스크 착용으로, 눈앞의 사람을 못 알아보다

오늘부터 코로나를 애완견처럼 옆에 데리고 살아야 한다. 코로나 감염 등급이 1등급에서 2등급으로 하향 조정되고 실내 다중이용시설에서도 음식을 먹을 수 있다. 이제 오늘부터는 코로나 종식은 아니고 같이 살자고 타협을 한 거나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코로나를 대형 도사견처럼 경계의 눈초리로 대하고 혹시나 나에게 달려들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하고 했는데 이제는 무섭기는 하지만 머리도 쓰다듬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무조건 경계하고 멀리해야 할 대상이 아니고 잘 달래고 구슬려서 발밑에서 꼬리 치게 만들어야 한다. 


경계를 너무 쉽게 푸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있기도 하지만 그래도 감염자와 사망자 추이를 보건대 우리 의료체계가 감당해 낼 수 있는 범위이기에 할 수 있는 용단이라고 볼 때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긴 하다. 전 국민 코로나 2차 접종 완료 비율이 87% 정도 되기에 가능한 일이다. 접종 여부에 생사가 달려있기에 적극적인 접종이 있었을 것임은 자명하지만 그래도 우리 민족은 위기 상황이 되면 빨리빨리 뭉쳐 극복해내는 데는 이골이 났다. 이런 민족적 DNA를 너무 믿어, 위기상황을 자초하는 일이 빈번해서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코로나란 바이러스가 어떻게 변이를 할지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이 상존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이는 과학적 경계 수위를 아무리 높인다고 해서 잡히거나 예측되는 상황이 아니다. 상황이 발생해야 그때서야 대처할 수밖에 없는 임기응변이 필요한 그런 미래다. 그럼에도 그 상황을 이번 m-RNA 백신 개발로 극복해 내듯이 인류는 반드시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을 강구해낼 것이 틀림없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창궐은 인간 삶의 많은 부분을 바꾸어 놓았다. 환경이 바뀌면 많은 다른 동물 종들은 사멸의 길을 걷는다. 반면 인간은 환경이 바뀌면 바뀐 환경에 적응하는 기민함을 보여 어떻게든 살아남는다. 이런 적응력이 현존 지구 표층을 지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마스크 착용만 해도 그렇다. 아직 마스크 착용이 해제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는 마스크 쓰지 말라고 해도 대부분 착용하고 다닐게 틀림없다. 마스크가 옷이 되어 버렸고 패션이 되어 버렸다. 마스크 착용이 1차 바이러스 차단의 거름망 역할을 하고 있음을 이번 코로나 사태로 절실히 경험했기에 이젠 마스크 벗기가 쉽지 않다. 습관이 무섭다고 이젠 외출하거나 할 때 자연스럽게 마스크를 쓰지 않던가 말이다. 1년 전을 생각해보자. 마스크 착용이 습관화가 안되어 있어 외출을 하거나 할 때 마스크를 쓰지 않고 무심코 엘리베이터 앞에 서있다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안에 있는 사람들이 마스크를 착용한 모습을 보고서야 화들짝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가?


사실 마스크를 착용함으로써 따라오는 불편은 여러 가지가 있다. 요즘처럼 봄꽃 만발한 계절에 꽃들의 향기조차 제대로 맡아볼 수 없었다. 오감 중에서 후각을 잃어버렸던 지난 코로나 시절이었다. 또한 여성들의 화장에도 영향을 주었다. 마스크로 화장이 지워지고 입술 루주가 묻어나는 불편과 짜증도 동반했다. 마스크 착용으로 제일 불편했던 일은 눈앞에 있는 상대방이 누구인지 빨리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일이다. 눈만 빼꼼히 보이니 자주 만나는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누구인지 빨리 판단하기가 어렵다. 마스크 착용으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해 벌어지는 실수와 해프닝은 얼마나 많았던가? 사람을 알아보기 위해 들이는 에너지를 지나치게 많이 소비할 수밖에 없다. 특히 마스크로 상대방의 표정을 볼 수 없으니 제대로 의사소통을 하려면 소리에 집중을 해야만 한다. 얼굴 표정을 보면 한눈에 상대방의 의중을 눈치챌 수 있음에도 이 기능을 마스크로 막아놓았으니 오로지 소리만으로 상대를 파악해야 한다. 사람을 만나면 예전보다 의사소통에 더 에너지가 많이 들고 힘들어진 이유다. 특히 말을 배우는 어린아이의 경우는 말하는 사람의 입술 모양을 보며 말을 따라 해야 하는데 마스크 착용으로 말 배우는 기간이 늘어났을 것임이 틀림없다. 


마스크도 벗을 수 있는 날이 곧 오기를 기대해본다.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면 좋겠고 심지어 우는 모습의 표정까지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래야 서로 공감하고 있음을 바로바로 알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마스크 뒤로 숨기지 않고 숨지 않는 날이 곧 올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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