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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Jun 23. 2022

장마 초입에서 푸른 하늘을 그리워하다

오늘은 하늘을 보았는가?


하늘 아래 살면서도 하늘 쳐다보는 일이 흔치 않다. 하늘 아래 산다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에 하늘을 쳐다보지 않는다. 아니 매일 쳐다볼 것이다. 다만 의식적으로 바라보지 않을 뿐이다.


의식적으로 바라본다! 중요하다. 의식적으로 봐야 판단을 할 수 있다. 하늘이 흐린 지, 맑은지, 쪽빛인지, 비가 내릴 것인지 등등 말이다.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면 그저 하늘일 뿐이다. 아니 하늘의 존재 자체를 인식하지도 못한다.


하지만 하늘이 정말 그리운 사람이 있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사람과 감옥에 갇혀있는 사람이다. 두 부류의 사람은 제한된 시간과 제한된 공간을 가지고 있다. 제한된 것의 반대는 자유다. 한계 지워진 시간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자유와 경계 지워진 공간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자유의 공통점이다. 이 자유의 상징적 시선이 바로 하늘이다.


한계 지어진 시간을 가진 사람에게 지금 볼 수 있는 하늘은 천금 같은 행운의 순간이다. 떠가는 구름 한 조각조차도 의미가 덧씌워진다. 구름의 회색빛 짙음의 농도까지도 눈에 들어온다. 하늘에 펼쳐진 청푸른 색깔이 얼마나 아름답고 황홀한지, 푸른색 물감이 되어 눈 속으로 뚝뚝 떨어져 들어온다. 내일 다시 못 볼 수 도 있는 광경이기에 눈을 뗄 수가 없다.


공간의 구속으로, 벽에 뚫린 작은 창문의 하늘만을 바라보는 감방의 죄수는 창틀의 제한을 받지 않는 광활한 넓이의 하늘을 간절히 보고 싶어 한다. 창문의 공간 크기만큼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시선에 다 담지 못할 정도의 하늘이 보고 싶다. 그 하늘의 배경이 밤이어서 어두울지언정, 그 까만 배경에 초롱초롱 빛나는 별빛이 보고 싶다.


시간과 공간이 경계를 부여받게 되면, 하찮게 보는 하늘조차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담게 되고 되살아나게 된다. 우리는 그저 가을 어느 날 공활한 하늘만 기억하거나 긴 장마 끝에 반짝 구름 사이로 보이는 하늘의 모습만을 떠올린다.

하늘색의 본질은 검은색이다. 심연의 우주가 검은 진공의 공간이기에 그렇다. 지금 우리의 하늘이 파란 것은 태양빛이 지구 대기를 통과하면서 짧은 파장의 푸른색이 가장 많이 산란되어 보이는 현상일 뿐이다. 대기의 경계 바깥으로 나가는 순간, 검은색의 하늘을 만나게 된다. 아니 그때부터는 하늘의 경계가 없어진다. 당연히 땅의 경계도 없어진다. 그저 텅 빈 검은 공간일 뿐이다. 인간의 눈은 그저 반사되는 빛만을 인지할 뿐이기에 반사되지 않은 빛은 검게 볼 뿐이고 모든 빛이 합쳐지면 하얗게 볼 뿐이다.


지금 서울시내의 바깥은 짙은 회색 구름이 비가 되어 대지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장마의 첫 소식이다. 며칠 동안 몬순의 지루한 비가 하염없이 내릴 것이다. 쪽빛 하늘의 고마움을 의도적으로라도 보게 만드는 자연은 인간의 심리를 들었다 놨다 하는 심리의 조종술사가 틀림없다. 


어떤가? 지금 하늘을 쳐다보면 비가 많이 내릴 것 같은가? 잿빛이라 더 아름다울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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