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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Aug 18. 2022

계절의 시간을 읽다

열흘간의 여름휴가를 마치고 사무실에 복귀했습니다.


일상에서 '쉬어간다'는 쉼표의 중요성을 알게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쉬어가야 바쁨도 바라보게 되고 바쁜 것조차 좋은 것인 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산다는 것은 리듬을 타는 것과 같은가 봅니다. 평탄한 길이 아닌, 오르내리는 길을 걷는 것이 바로 산다는 일입니다. "서두르지도 말고 멈추지도 마라"라는 스페인 속담이 있듯이 삶의 지혜는 리듬의 길을 걷으며 듣게 되는 자연의 음악 속에서 나오는가 봅니다.


열흘만에 출근 준비를 하면서 샤워기 꼭지가 온수 쪽으로 옮겨져 가는 걸 눈치챕니다. 아직 더위의 기승이 잔존하고 있겠지만 태양의 기울기는 아침저녁으로 이미 찬 기운을 몰고 와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20~30년 전만 해도 동해안 해수욕장은 보통 8월 15일이 폐장 기준일이었습니다. 광복절이 지나면 이미 동해안은 물이 차가워졌기 때문입니다. 올해 동해안 해수욕장 폐장일은 대부분 21일 하는 걸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일주일 정도 늦춰졌다고 해도 될까요? 여름의 끝자락인 처서(處暑)가 다음 주 화요일인걸 보면 절기상으로는 더위도 이미 끝물임에는 틀림없는 듯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자다가 서늘해서 이불을 당겨 덮고 있는 것 역시 눈치챘을 겁니다.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에 귀뚜라미 소리의 데시벨이 더 높아지고 있음도 말입니다. 지역에 따라 다르겠지만 제가 사는 신내동은 매미소리보다는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장악한 아침입니다. 어제 아침 중랑천을 조깅하면서도 귀에서 블루투스 이어폰을 빼고 소리에 집중해 봤습니다. 중랑천 쪽은 매미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혼재하고 있었습니다. 소리의 크기야 당연히 매미소리가 크겠지만 그 우렁참이 한여름 절정기만 못하다는 것도 금방 눈치챌 정도입니다. 그렇게 온도의 시간은 빠르게 우리 곁을 지나쳐 가고 있습니다. 눈치채고 못 채고는 피부로도 느끼고 귀로도 듣게 되는 정도의 차이일 뿐입니다.

사마귀가 매미를 엿보는 당랑규선(螳螂窺蟬)처럼 한 치 앞도 모르고 사는 게 인생이긴 합니다. 가끔은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봐야 내 주변에는 무엇이 있고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모래구멍에 머리만 처박은 타조가 되지 않으려면 이렇게 주변을 훑어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시선의 높이를 위아래로 조절하는 능력을 얼마나 유연하게 연마하느냐가 인생을 잘 살고 있음을 가늠하는 지표가 될 수 있을 겁니다. 감각을 날카롭게 벼르면 안 들리던 소리가 들리고 코로 향기가 전해져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 미세한 차이조차 감별해 낼 수 있습니다.


차이의 감별은 비교입니다. 과거의 기억을 바탕으로 변화를 감지해내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기억은 과거의 저장이 아닌 미래를 모델링하기 위한 근거로 활용하기 위한 미래지향적 데이터입니다. 인출되지 않는 기억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비교할 수 없는 데이터는 소용이 없습니다. 기억은 과거에 있지 않습니다. 현재로 불러들여 미래로 향하는 것이 기억입니다.


날카롭게 나를 벼르고 무두질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나의 현재를 넘어 미래를 향하기 때문입니다. 그 길이 어떤 리듬의 위치에 있을지는 무한대의 확률 속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감각을 세우고 정신을 가다듬어 세상을 보면 지금보다는 좀 더 밝은 길을 걸을 수 있을 거라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런 믿음만이 세상을 더 살만한 곳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일 겁니다. 


조금은 긴 휴식을 끝내고 다시 일상과 마주합니다. 정신을 가다듬어야 하는 이유가 지금 내 앞에, 책상 위에 놓여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부딪혀보고 맞서는 시간 속으로 다시 들어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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