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불편한 진실(An Inconvenient Truth)과 마주할 수 있는가? 불편한 진실은 편안한 거짓말(Comforting Lies) 속에 감추어진 진주일까? 옳고 그름에 대한 가치판단의 잣대를 어디에 들이댈 것인가에 대한 양심의 천칭은 어느 쪽으로 기울고 있는가? 편안하고자 함에 무게를 두면 거짓조차 용인할 수 있는가? 진실을 드러내면 정말 불편해지는가?
질문의 범위가 너무 넓다. 사회적 현상에 대해 이 질문을 던지면 끝없는 논쟁을 불러올 수 있다. 범위를 좁혀 개인의 문제로만 국한시켜보자.
나에게 있어 불편한 진실은 무엇인지 물어보자는 것이다.
떠올리기만 해도 수치심이 느껴지는 일들은 없는지, 다른 사람이 알면 두려운 일들을 한 적은 없는지 말이다. 굳이 고해성사를 하자는 것은 아니다. 수치심을 느끼고 두려움을 느끼는 일들이 있다면 '잘못되고 틀린 것이 있었음에도 저지른 짓이 있다'는 것이다. 나만이 알고 있는, 나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는 일은 그래서 힘들고 어렵다. 저질러 놓고 회피한다. 왜 그랬을까? 무엇이, 찝찝하고 불편함에도 행동하게 만들었을까?
보상의 달콤함이다. 행위는 반드시 목적지향성에서 표출된다. 목적지향이 바로 보상을 전제로 한다. 뭔가 얻는 것이 있어야 움직인다. 보상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 것이 동물 시스템의 근본이다. '불편한 진실'을 가지고 있거나 했다는 것은 당시에는 그에 따른 보상의 유혹과 가치가 더 컸음을 의미한다. 그래야 불편한 진실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런데 선택한 방향이 어느 쪽을 향하고 있느냐가 불편이냐 편안하냐를 결정한다. 양쪽을 모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실인 줄 알면서도 행하지 않아서 불편할 수 도 있고 거짓인 줄 알면서도 행해서 불편한 경우가 동시에 존재한다. 어느 쪽이 더 불편할까?
그래서 이 불편함의 기울기에 정당화를 올려놓기 시작한다. 자기 합리화를 통해 선택한 행위가 문제없다고 계속 최면을 건다. 왜곡하고 조작해서라도 합리화의 루트를 마련해 놓아야 마음이 그나마 편안해지기 때문이다. 감출 수 있고 감추어졌다고 위안을 삼는다. 불편한 진실은 그렇게 하나 둘 쌓여가고 세월의 두께가 깊어가면 갈수록 무뎌져 진실과 거짓 사이의 경계가 흐릿해져 버린다.
자기 이득을 위해 타인을 속이지 않고 자기 목적을 이루고자 타인을 힘들게 하지 않는 일, 자기 몸이 당장 편하자고 진실을 회피하고 왜곡하지 않는 일, 자기 자신의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지는 일, 이런 일들이 불편한 진실과 마주할 수 있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한다.
바로 신독(愼獨 ; 남이 보지 않는 곳에 혼자 있어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도록 조심하여 말과 행동을 삼감)하는 일이다. 나 자신과 마주했을 때 부끄러움이 없어야 불편한 진실과도 마주할 수 있다. 말과 행동이 다르지 않은지 살펴보아야 한다. 일신의 안위를 위해 주변을 못 본 체하지 않았는지 돌아볼 일이다. 자기 경계에 게을러지면 편안한 거짓의 유혹에 빠지고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게 된다. 나를 드러내 발가벗고 서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