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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Sep 15. 2022

전철 개찰구 앞의 양심

저는 전철로 출퇴근을 합니다. 살고 있는 아파트도 망우역 전철역까지 걸어서 5분 거리에 있고 사무실도 시청역에서 내리면 바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회기역이나 왕십리역에서 갈아타는 시간까지 포함하여 출근시간 도어 투 도어 40분 걸립니다. 서울시내에서 이 정도 출퇴근 시간이 소요되면 최적의 상황이 아닌가 합니다. 집에서 회사까지의 거리는 18km밖에 안됩니다. 이 거리를 차를 운전하고 와도 비슷한 시간이 소요됩니다. 거리로 보면 쌩하고 달리면 20여분 정도면 될 것 같은데, 서울시내 주행속도가 50km밖에 안되는 데다가 차량도 많고 신호등에 걸려 가다 서다를 반복하다 보면 40분 정도는 기본적으로 걸립니다.


비슷한 시간이 소요되는데 굳이 차를 운전하고 출근할 이유가 없습니다. 차를 운전하는 동안은, 운전하는데 정신을 집중해야 하므로 아무것도 못합니다. 그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귀를 열어놓는 정도일 겁니다. 전철을 탈 경우에는 책을 읽을 수 도 있고 운 좋게 자리가 비어 앉을 수 있으면 짧은 시간이나마 졸 수 도 있습니다. 전철의 가장 큰 장점은 머리 디밀고 타기만 하면 정확한 시간에 데려다준다는 겁니다. 차는 도로 상황이 그때그때 달라 변수가 많다면, 전철은 고장 나지 않는 한 거의 정해진 시간에 도착합니다. 직장생활 30년이 넘었지만 전철로 출퇴근하면서 전철 고장으로 문제가 되었던 적은 제 기억으로 10번도 안 됩니다. 그 정도라면 전철의 정시운행률은 최고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아침 6시 20분에 전철역에 도착하여 개찰구 앞에서 교통카드 단말기에 휴대폰을 들이댑니다. 휴대폰 NFC(Near Field Communication ; 근거리 무선통신) 기능을 활용해 후불교통카드를 등록했기 때문입니다. 신용카드에도 RFID(Radio Frequency Identification ; 주파수 무선 인식) 기능으로 교통카드 등록이 되어 있지만 휴대폰에 있는 교통카드 기능을 주로 사용하게 됩니다.


지하철 개찰구 단말기에서 '삐'하는 인식 완료 소리가 들립니다. 그런데 옆 개찰구에서 사람이 들어가는데 '삐빅'하고 다른 소리가 납니다. 


"잉? 왜 다른 소리가 나지?"


사실 교통카드는 청소년으로 등록된 카드이거나 만 65세 이상 경로우대로 발급받은 것은 단말기에 접촉하면 '삐빅'하고 두 번의 신호음으로 인식 확인을 합니다. 아! 또 있습니다. 장애인이나 유공자로 등록된 사람도 수도권 철도 무임승차 대상자가 되어 우대 교통카드를 발급받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대 교통카드의 경우 부정 승차를 방지하고자 단말기에 카드를 접촉하면 일반 교통카드와 다른 인식 소리를 내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개찰구를 지나 플랫폼으로 내려오면서 '삐빅'하고 소리를 냈던 사람을 유심히 쳐다봅니다. 외모상으로는 청소년이거나 경로우대를 받을 만큼의 연령대는 아닌 듯했고 외모상 나이를 많이 쳐줘도 60은 안되어 보였습니다. 그렇다고 독립유공자나 5.18 민주 유공자는 외모로 보이는 연령대로 보건대 분명히 아닌듯했고, 사지 멀쩡해 잘 걸어가는 걸 보니 장애인복지법에 해당되는 사람도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우대 교통카드를 소지하고 계신 걸까요? 제가 모르는 또 다른 우대카드가 있는 걸까요? 집에 있는 자녀의 교통카드를 잘못 가지고 나오셨을까요? 그리고 최악의 경우인 의도된 부정승차일 가능성일까요? 우대 교통카드 사용 본인이 아닐 경우라면 조마조마하고 겁이 나지 않을까요?


그런데 오늘 아침 '삐빅' 소리의 주인공은 아주 태연하게 개찰구 단말기를 지나가는 걸 보면 문명 본인이 등록한 카드가 맞을 겁니다.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괜한 오지랖으로 타인을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본 나를 부끄럽게 되돌아봅니다. '삐'소리가 나든 '삐빅'소리가 나든 '삐비 빅'소리가 나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그렇다고 저 사람 '삐빅' 소리 나니 부정 승차한 것 같다고 신고할 것도 아니면서 말입니다.


그럼에도 가슴 한 구석에 양심이라는 단어가 따라붙습니다. 양심의 무게는 돈의 무게와는 다릅니다. 양심(良心)은 신독(愼獨)과도 같습니다. 홀로 있어도 그 무게가 변하지 않아야 양심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의심의 눈초리로 보기 시작하면 계속 부정적으로만 보이게 됩니다. 의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결국 나쁜 놈으로 결론을 냅니다. 의인물용 용인 물의(疑人勿用 用人勿疑 ; 믿지 못하면 쓰지 말고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의심과 믿음의 경계를 어디에 그을 것인지 애매하기도 합니다만 그래도 경계의 천칭을 믿음 쪽으로 옮기고 싶습니다. 어설프게 의심하지 않고 또한 속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도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 달려있습니다. 사람을 본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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