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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Sep 22. 2022

질문을 잘해야 한다

산다는 것은 일상을 묻는 행위다. 질문이 삶의 방향을 쥐고 있다. 질문이 곧 관점이 될 수 있다. 무엇을 묻고 있느냐는 그 사람의 미래를 좌우할 만큼 중요한 전환점의 기로가 된다. 그래서 질문을 잘해야 한다.


질문은 시간과 만나는 온갖 상황에 던지게 되는 이정표와 같다. 일상의 선택에 앞서 항상 질문이 먼저 등장한다. 할 것인지 말 것인지, 갈 것인지 말 것인지조차 질문이 앞서야 선택에 따른 행동이 정해진다. 그래서 사람의 행동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질문을 하는지 눈치챌 수 있다.


곧 질문의 수준이 그 사람의 수준이 된다. 무엇을 묻고 있는지에 따라 행동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질문은 '나에 대한 내적인 물음'이다. 내 행위를 규정하고자 하는 선행사고로 작동하기에 그렇다. 하지만 타인에게 묻는 외적인 질문도 있다. 사실은 외적인 질문도 내적인 질문의 답변을 구하는 형식이긴 하다. 타인에게 질문을 하여 답을 구하는 행위조차도 내가 경험하지 못하고 사고하지 못했던 것을 선행 학습하여 나의 행동으로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다.


그런데 타인에게 물을 때 자기 자신에게 물을 때와는 다르게 여러 감정이 개입한다. 자기의 질문이 가지고 있는 가치에 대한 상대방과 군중의 반응을 염두에 두기 때문이다. 질문 자체가 자기의 얼굴임을 안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궁금한 호기심의 발로에서 정중히 묻는 질문이 있는 반면,  "혹시나 질문 자체가 우습게 보이면 어떡하지?" "똑바로 묻고 있는 건가?"와 같은 자존심이 작동하는 소심한 질문도 있으며 상대방의 수준이 자기보다 낮다고 지례 짐작하고 깔보듯이 넘겨짚는 자만심의 질문도 있다. 심하게는 정치판과 청문회에서 답변자를 조롱하고 망신주기 위해 일부러 던지는 야비한 이기심의 질문도 있다. 곧 국정감사 시즌이다. 본질을 지적하고 개선의 여지를 지적하는 건실한 질문보다는 호통치듯이 윽박지르고 큰소리치는 질문이 난무하는 현장을 더 많이 보게 될게 뻔하다. 너무나 많이 봐왔기에 이제는 감각이 무뎌져서 그러려니 하는 수준까지 왔다. 바로 정치인들의 질문 수준이다. 질문 사안에 대해 심층 조사와 분석을 하지 않았기에 곁다리만 가지고 물고 늘어지고 호통쳐서 자기의 미진함을 감추려는 수작일 뿐이다. 막장 정치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나는 현장을 보게 될 것이 뻔하기에 벌써부터 낯 뜨거워지고 정치 소식을 외면하게 된다.

아인슈타인도 "중요한 것은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The important thing is not to stop questioning.)"라고 했다. 질문의 끝에 답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수도승과 수도사들이 끊임없이 수행을 하는 과정도 끊임없이 질문을 놓지 않고 용맹 정진하는 일이다. 질문에 대한 답이 해탈이 되고 깨달음이 된다. 묻지 않으면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다.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물어야 하는가?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조차 막막할 수 있다. 매 순간순간 질문이 습관이 되어 반사작용으로 움직이다 보니 묻는 조건이 빠진 상태가 되어버렸다. 아무 생각 없는 것처럼 행동했던 일상조차 되물어보자. 새로운 공부와 모험에 도전을 하고 새로운 호기심을 작동시키고 그동안 하지 않았던 운동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자. 그래야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 질문하지 않는 삶은 품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질문을 하면 개선할 것이 생기고 개선하고 보수하다 보면 어느새 체력이 다져지고 외부 충격을 감내할 내성을 갖추게 된다. 자신의 내외적인 수준을 차근차근 높이고 올리는 일이다. 그것이 질문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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