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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Oct 11. 2022

그림을 보는 안목, 세상을 읽는 안목

예술을 보는 데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진리는 삶의 궤적 어디에나 적용되는 문구이지만 예술 작품을 보는 시각에 있어서는 철저히 그러하다.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데 왜 안목이 필요한가?


예술가들의 결과물인 그림, 공연, 조각, 책 등등 미술가는 미술가 나름대로, 음악가는 음악가 나름대로, 무용가는 무용가 나름대로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대상을 표현해낸다.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사용했던지 간에 머릿속에 상상한 대상을 그리고 만들고 연주해낸다. 


혹자는 예술가들이 표현해 낸 결과물을 감상하는 것은 오로지 관객의 몫이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대상을 보고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일 것인지는 보고 읽는 사람의 오감을 통해 재해석되기 때문이다. 호평을 하던 악평을 하던 아니면 무감각하던,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은 작가의 것이 아니다.


하지만 작가가 창조해낸 작품의 세계를 관객의 눈으로 평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고 바라보면 새롭게 보인다. 이해의 확장이다. 안목이 필요한 이유다.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면 나에게 아무 의미도 없는 한낱 고철이고 벽지이며 돌이고 소음일 뿐이다.


유홍준 교수는 '안목'이라는 책을 통해 "예술을 보는 안목은 높아야 하고 역사를 보는 안목은 깊어야 하고 현실 정치, 경제, 사회를 보는 안목을 넓어야 하고 미래를 보는 안목은 멀어야 한다"라고 했다. 세상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에 대한 안목의 관점을 명쾌히 제시하고 있다.


예술에 대한 안목을 높이기 위해서는 스승을 잘 만나야 한다. 줄을 잘 서야 하는 것이다. 타고난 천재라도 스스로 빛을 발하기는 어렵다. 빛을 발할 수 있도록 줄탁동시(啐啄同時 ; 병아리가 부화하기 위해 껍질을 쪼아대면 어미 닭이 신호를 알아차리고 바깥에서 알 껍질을 쪼아 돕는다)해줄 스승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우리는 정답을 주고 정답을 따라가는데 익숙해 있다. 빨리빨리 결과를 알아야 결론을 내고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해서다. 과정은 중요치 않고 결과가 우선인 사회였다. 선행학습을 낳았고 그렇게 결과에 충실했고 만족해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정답에 익숙하다 보니 예술작품을 바라봐도 어떤 결과가 있을 거라 생각이 든다. 내가 바라보는 시각은 모자라 보이고 부족해 보인다, 정답이 아닌 것 같다. 바라볼 엄두조차 안 낸다. 미술관 음악회가 썰렁한 이유다. 하지만 유명 작가의 전시회 등은 관객이 미어터진다. 유명 식당 안 가보면 대화가 끼어들 수 없는 것처럼 "나도 가봤어"가 중요하다. 무엇을 느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도 봤고 거기 있었다는 게 중요하다. 저급한 안목, 아니 안목을 키우지 못한 결과다. 혹시라도 전시회에 갔다면 최소한 도슨트의 설명을 들어야 한다. 예술작품의 감상에는 전문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안목을 계속 확장해 나가야 넓고 깊게 볼 수 있다. 작품이 다시 보이게 된다. 그저 그어놓은 선이 아니고 빚어놓은 진흙이 아니다. 살아 있는 움직임이고 작가의 삶이 그림 색상 곳곳에 묻어있음을 눈치채게 된다. 그때서야 내가 아닌 또 다른 한 사람의 고뇌와 희열과 사랑과 죽음을 알게 된다. 안목은 그만큼 중요하다.


세상을 보는 눈의 높이는 끝이 없다. 알면 알수록 깊고 넓고 높다. 정답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선과 관점을 확장하려는 이유는 내 삶의 범위를 넓히고자 하는 것이다. 다양성에 대한 수용이다. 편협을 벗어난 포용이다. 물질이 정신과 관념을 만들고 그 상상이 다시 물질을 제어하는 세계에 대한 이해다. 내가 미처 보지 못한 사물과 현상과 사건을 다시 보게 하는 일이다. 세상이 달리 보이는 기이한 현상을 목도하는 일이다. 그렇게 안목을 높일 일이다.

작가의 이전글 글에는 리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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