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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Oct 21. 2022

'공부'의 정의를 다시 내리자

공부는 학교 다닐 때만 하는 것인가? 


유치원 다니는 것을 "공부하러 간다"라고 표현하지는 않는다. 공부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하는 시기가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교 다닐 때까지가 아닌가 한다. 대학을 넘어 대학원을 진학해도 공부한다는 표현이 조금 어색하게 들린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공부도 졸업한다고 생각한다.


공부에 대한 정의를 잘못 내렸기 때문이다. 공부를 입신양명의 수단으로만 여겼기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학교 다닐 때 공부가 지긋지긋하여, 사회에 나오면 공부를 안 해도 될 것으로 생각했는데 취직을 하고 났더니 진급시험이다 업무향상 시험이다 해서 계속 공부를 해야 하더라는 넋두리도 흔히 듣는다.


공부의 정의를 "학문을 배워 익히는 것"으로 한정하면 제도권 교육 안에서 배우는 것으로 축소될 수밖에 없다. 공부를 "변화무쌍하게 변하는 외부 환경에 적절히 적응하고 응대하고자 방법론을 익히는 과정"이라고 정의 내리면 공부는 평생을 따라다니게 된다.


우리는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교 4년을 합친 16년의 기간 동안만 공부하고 이때 얻은 지식과 지혜로 남은 평생의 삶의 도구로 활용하며 살아간다. 졸업한 이후에도 세상은 끊임없이 새로운 기술과 문명과 문화가 생겨남에도 새롭게 배우고 공부하려고 하지 않는다.


새롭게 익히고 배우지 않으면 절대 총명해지지 않는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지식과 지혜가 늘어가야 하는데 정신이 흐릿해져 판단력도 떨어진다. 우리는 그저 나이 들어 그런 것이다고 핑계를 댄다. 나이 들어 가끔 기억이 깜박깜박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집 전화번호도 생각나지 않는 것은 휴대폰에 저장된 기능 때문으로 치부해버린다. 그러다 보니 점점 세상 일에 관심이 없어지고 평소 습관대로 주변의 서너 가지 일에만 생각이 고착화된다. 고지식한 꼰대가 되어 간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성세대의 모습이다.

공부의 정의를 다시 내려보자.


시험을 앞두고 점수를 올리기 위해 하는 공부가 전부가 아니다. 시험을 위한 공부는 시험이 끝남과 동시에, 같이 머릿속에서 사라지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희한하게도 시험이 끝나면 머리도 깨끗이 비워진다. 하지만 공부는 지식을 쌓는 일이다. 지식에는 끝없는 계층(hierarchy)이 있다. 지식은 평등하지 않다는 것이다. 알면 알고 모르면 모르는 영역이 뚜렷하게 구분된다.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구분이다. 평등하지 않은 지식의 세계에서 평등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공부다. 공부는 삶의 질을 높이는 일이고 세상사는 일을 지켜보고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같이 손을 놓아야 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공부는 이해하기 위해 하는 게 아니다. 이해는 공부하다 보면 그냥 따라오는 것이다. 공부는 삶을 가지고 노는 행위다. 다만 체계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이 필요하다. 패턴을 비교하고 기원을 추적하고 공간적 관계를 보는 행위다. 자연이든 사회든 인간이든 기본 구조를 가지고 있다. 구조들이 절묘하게 결합되어 물질이 되고 생명이 된다. 그 결합의 봉합선을 떼어내 보는 것이 공부다. 다양성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아인슈타인은 "만약 나에게 문제를 위한 1시간이 주어진다면 문제가 무엇인지 정의하는데 55분의 시간을 쓰고 해결책을 찾는데 나머지 5분을 쓸 것이다"라고 했다. 공부의 첫 단계는 '무엇이 문제인지? 무엇이 중요한지? 주어진 일, 내 앞에 노정된 현상의 핵심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물음으로서 시작'된다. 잘 물어야 잘 찾을 수 있다. 공부는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자기에게 질문을 잘한다는 것은 유니크한 꿈과 상상을 하게 하는 것이고 이를 실천하게 하는 동력이 된다. 꿈을 꾸고 이를 이루기 위해 정진하면 반드시 이루어진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붉은 악마의 표어는 그래서 설득력을 갖는다. 하지만 막연한 상상은 금물이다. '잘 될 거야'라는 희망고문은 절망을 크게 할 뿐이다. 공부는 막연히 덤비는 무모함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묻고 행하고 방향을 수정하는 과정을 통해 자기가 목표하고 지향하는 곳을 향해 가는 과정이다. 평생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다. 치매에서 멀어지느냐 가까워지느냐의 기로에 공부가 방향키이기도 하니 어찌 공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망설이다 치매 걸린다. 당장 무슨 공부를 할 것인지 찾아보자. 악기라도 하나 손을 들거나 귀 닫았던 외국어를 다시 듣기라도 시작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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