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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Oct 27. 2022

결핍과 충만의 역설

과유불급(過猶不及 ; 정도가 지나침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이라 했다. 지나침은 남는 것이고 미치지 못한 것은 부족한 것이다. 얼마나 있어야 남는다고 하고 얼마나 적어야 부족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과연 부족한 것이 더 좋은 것인가? 


하지만 잘못된 접근이다. 문구를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모자람이 지나침보다 낫다는, 우열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지나침과 모자람은 동급이라는 소리다. 해석의 시각을 달리하거나 바로잡으면 전혀 다른 상황이 보인다. 관점과 시선의 높이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애매모호하고 '그럴 것이다' 정도의 접근을 하면 상황이 흐리멍덩해진다. 단어는 적재적소에 맞게 사용되어야 명확한 전달이 가능하다. 메타포(metaphor)를 담을 경우는 더욱 조심해야 한다.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해를 하여 오해를 사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핍과 충만을 논할 때도 상황을 한정해야 한다. 그래야 오해의 해석을 막을 수 있다. 특정 상황에 적용하는 것은 쉽지만 보편 상황에 적용하기에는 적절치 않은 경우가 많다. 보편성은 그만큼 어려운 논제다. 쉬울 것 같지만 제일 어려운 것이 보편성이다. 모든 것에 두루 통하거나 적용되는 것은 중력이나 일반상대성이론 같은 물리법칙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 오죽하면 '특수상대성이론'도 '빛의 속도는 일정하다는 광속 불변의 원리와 등속 운동을 한다는 상대성 원리'를 가정하고 시간과 공간에 대한 해석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을 사는 삶으로 결핍과 충만을 끌고 들어오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상황이 연출된다. 무수히 많은 사례를 들어 두 단어 사이의 관계를 정의 내릴 수 있다.


관념의 세계에서는 결핍이 충만을 이기는듯하다. 남는다는 것은 이미 채워진 상태다. 더 채울 수 있을지 모르지만 과욕으로 연결된다. 남는다는 것은 여유일 수 있으나 여유로 비치기보다는 욕심으로 비치는 경우가 더 많다. 하지만 부족하다는 것은 채울 희망이 있다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살아가야 할 힘의 원천이 될 수 있다. 부족해서 좌절할 수 있고 포기할 수 있기도 하다. 그러나 포기하고 좌절했다면 세상은 한없이 추락해서 회생 불가능했을 것이다. 지금 눈앞에 펼쳐져 있는 세상은 결핍을 채우기 위한 부단한 노력의 산물이다. 이미 채워져 있으면 더 채울 필요가 없으니 손 놓게 되고 잊어버리게 된다. 부족한 다른 무언가를 찾아 이동하게 된다.


부족해야 부족을 채우기 위한 방편을 생각하게 된다. 없는 것은 만들고 못 본 것을 찾게 한다. 부족, 결핍은 만족, 충만의 반대어가 아니고 동의어나 다름없다. 그래서 결핍과 충만의 경계에 대한 수위를 정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경계의 수위를 어느 쪽으로 더 끌어내리고 올리느냐에 따라 삶과 생활의 강도를 결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채우는 것도 어렵지만 버리는 것도 어렵다.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채우고 버리는 경계 사이를 외줄 타기 하듯 왔다 갔다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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