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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Oct 31. 2022

최선의 위로(慰勞)

오늘 아침 글을 써야 할지 망설였습니다. 키워드를 잡지 못해 주저했던 이유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주말에 들려온 이태원 사고의 잔상이 머릿속에 남아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분위기 파악 못하고 엉뚱한 글이 전개될까 두려움이 컸습니다.


지금은 어떠한 위안과 위로의 말도 소용없는 시간입니다. 그저 조용히 기도하고 묵상하여 애도를 공감하는 정도가 지금 주변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위로입니다.


위로(慰勞 / Consolation ; 따뜻한 말이나 행동으로 괴로움을 덜어주거나 슬픔을 달래 주는 것)의 말은 섣불리 하면 안 됩니다. 호의라고 내뱉는 위로의 말이 독화살이 될 수 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위로를 받는 대상의 상태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기 때문입니다.


위로는 괴로움과 슬픔의 공감이 핵심입니다. 말을 통한 언어적 표현과 몸짓을 통한 비언어적 표현으로 공감을 전할 수 있습니다. 위로에는 말보다는 비언어적 표현이 훨씬 더 효과적입니다. 그저 따뜻하게 손잡아주고 어깨를 안아주는 것만으로 족합니다. 상대에 대한 이해이자 공감의 전달입니다.


이 상황에서 말을 통한 위로는 공감을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말을 통한 위로는 상투적 표현으로밖에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위로의 말로 할 수 있는 표현들은 뻔합니다. "얼마나 황당하십니까?" "어찌 이런 일이 ---" "마음을 추스르셔야 ---" "이렇게 상심하다 몸 축내면 안 됩니다. 산 사람이라도 살아야지 ---" 등등, 이런 말들은 듣는 순간 오히려 감정을 자극하게 됩니다. 위로를 한답시고 말을 했는데 상대에게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고 오히려 자극하는 말로 다가갑니다.

말을 절제해야 하는 상황이 바로 위로의 순간입니다. 말에는 감정이 실리고 사회적 정서가 얹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이 가지고 있는 이중성입니다. 화자의 마음을 전하고 청자가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동시에 작동합니다. 하지만 말은 하는 사람이 원천입니다. 위로는 듣는 사람의 상황이 먼저입니다. 위로의 순간은 상황이 말을 앞서 있습니다. 말이 따라가지 못할 상황이라는 겁니다.


위로의 말을 하는 사람의 심리는 상대에 대한 배려가 당연히 우선일 거라 생각하지만 말을 하는 순간 자기 위안이 먼저 작동합니다. 자신은 동변상련 한다고 생각하지만 상대방은 공감하지 못합니다. 위로의 말에 있어서 주체는 내가 아니고 상대방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말을 하는 순간, 말의 주체는 내가 되어버립니다. 내가 위로 하는 거고 내가 같이 슬퍼하는 거고 내가 걱정하는 겁니다.


위로에는 주체가 상대방이 되어야 합니다. 상대방의 상황에 같이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 이 공감의 상황은 말로 표현되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손 잡아주고 안아주어 심장 뛰는 소리를 같이 들어야 가능한 공감입니다. 슬픔의 공유는 인간 이전의 감성인 모양입니다. 마음이 착잡한 모두에게 따뜻한 체온을 내어줍니다. 10월의 마지막 날, 가로수에 내려앉은 가을이 슬퍼 보이지 않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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