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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Apr 08. 2020

초록의 짙어감, 驚異

인문학에서는 "자고 일어났더니 세상이 바뀌었다"라는 표현으로 변화를 이야기합니다. 이 인문학적 표현을 요즘 아침마다 보이는 자연의 색에 대비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바로 초록의 짙어짐입니다. 매일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길을 나서다 보니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모습이기에 이 아침에 맞는 초록은 더욱 짙어 보입니다.


가로수 은행나무마다 돋아난 초록의 새순은 벌써 나뭇가지 사이의 빈 공간을 메워가고 있습니다. 아직 돋아난 새순의 색깔 농도가 짙어지지는 않았지만 잎의 수와 크기를 늘려 그 농도가 짙어진 것 같은 착시로 보이게 됩니다.

동양에서는 색을 色으로 표기하고 존재, 물질로도 읽습니다. 빛이 있어야 있는 것이라는 논리는 대단한 통찰력이 아닌가 합니다. 우주에서 4%만 차지하고 있는 물질 자체조차 빛으로 인하여 비로소 그 존재를 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학이 전무했던 동양이지만 사색만으로도 우주를 관통한 혜안이 신기할 따름입니다.


연초록의 색이 하루마다 늘어나고, 커가는 크기도 눈으로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자랍니다. 이제부터는 에너지 확보 경쟁에 돌입했음을 직감하게 합니다. 광합성을 통해 광자로 물을 분해해 식물의 에너지원인 자당(sucrose)을 만들어내기 위해 경쟁적으로 햇빛을 향합니다. 에너지를 만들기 위한 원천으로 빛을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햇빛을 향하여 줄기를 뻗어 일분일초라도 광자에 노출되기를 원합니다. 줄기가 휘어도 개의치 않습니다. 불편함이 죽는 것보다는 훨씬 이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연에는 이미 소리 없는 경쟁들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생명으로 존재하는 한, 그 어떤 것도 피해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카이스트에서 뇌과학을 가르치고 있는 김대식 교수가 저술한 '인간을 읽어내는 과학'이라는 책에도 '삶의 의미'에 질문을 던지며 " 세상에 나오기 전부터 이 세상에 태어나겠다고 동의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연히 태어난 뒤에도 인생이라는 것 자체가 우연의 합집합이다. 존재에는 선택권이 없다. 우리에겐 우연히 이 세상에 태어나 우리보다 먼저 태어난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규칙에 따라 역시 우연한 결과물인 이 세상을 필연이라 생각하며 살아간다."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는 의미는 스스로 잦아야 함에 동의합니다. 주어진 환경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고 해버리면 어떤 것도 이룰 수 없고 개척해나갈 수 없습니다. 물론 모든 시작은 차별로 시작하는 것도 맞습니다. 식수와 일용할 음식이 부족한 오지에서 태어난 아이와 선진 도시의 병원에서 태어난 아이의 기회가 같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 아이가 본인의 의지로 세상에 온 것이 아니기에 분명히 태어남 자체도 차별적으로 시작했습니다. 실재는 동일하나 현상이 차별적인 것입니다.

자연은 현상이 아닌 실재이기에 모든 세상 만물에 동일한 기회를 제공합니다. 자연에 존재하는 그 어느 것, 어느 누구도 세상에 등장하기를 동의한 적이 없기에 조건이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왕후장상이 따로 없고 귀천이 따로 없다는 것입니다. 자연은 그런 것입니다.


초록의 색이 짙어지는 것은 환경에 최적으로 적응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자연은 이미 인간의 눈으로 경이를 떠올리기 전에 그 자체로 경이로움이었습니다. 아니 자연은 그 자체를 경이롭다 말한 적도 표현한 적도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 자체였습니다.


인간만이 의미를 부여해 '경이(驚異 ; 놀랄 만큼 신기하고 진기함)'라는 언어로 자연에 가치를 부여합니다. 가소로운 일이나 그 의미로 인하여 가치를 부여받고 존재를 인식하게 됩니다. 자연은 무한의 순환과 환원으로 그 존재함을, 은행나무 가지 끝에 펼쳐진 초록의 크기 속에서 엿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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