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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Dec 16. 2022

사는 게 힘들지라도

"무덤 앞에 서있는 자는 무덤 안에 들어간 자를 절대 이해할 수 없다"


절박함이라는 벽 앞에 서서 손톱이 빠지도록 시멘트를 긁어내 봤는가? 리바이어던(Leviathan)의 목구멍에 창을 박고 온 힘으로 버티며 팔근육의 에너지가 서서히 빠져나가는 리얼함에 좌절해 봤는가? 바늘구멍조차 보이지 않는 막막함의 어둠 속을 헤매다 냄새나는 시궁창에 발을 헛디뎌 절망해 본 적이 있는가? 아침 햇살이 창턱을 넘어 들어오는 것이 두려운 무기력의 공포에 휩싸여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어둠의 뱃속으로 다시 기어들어가 본 적이 있는가?


세상 살면서 한 번쯤 삶의 위기라고 느끼는 순간을 돌다리 건너듯 지나오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마는 세상의 힘듬은 자기 어깨 위에 있을 때가 가장 무겁다. 누가 대신 짊어져줄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눠 짊어져 준다고? 절대 그렇수 없다. 눈에 보이는 물리적 무게라면 여기저기서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도와줄 수 있겠지만 심리적 무게는 실체를 알 수 없다. 도움을 주고 싶어도 쉽지 않다. 그런데 대부분의 좌절과 무기력은 심리적 현상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심리적 좌절은 어깨 처짐으로 나타나고 멍하니 하늘 바라보는 표현형으로 눈치챌 수 있다. 하지만 스트레스는 누가 주는 게 아니고 내가 스스로 자가발전한 결과다. 스스로 무덤을 파고 걸어 들어간 파국의 모습이다. "뭔 소리? 스트레스는 사무실에서 악다구니를 하고 있는 부서장과 사장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연말 실적의 숫자가 보여주는 처절한 현장의 목소리다"라고 규정하고 외부로 원인을 돌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스트레스가 나를 무심히 지나쳐 가도록 할 수 있는 것도 나이고 나에게 머물러 혈압을 올리는 원흉으로 남게 하는 것도 나다. 원인은 밖에서부터 유입될지 모르지만 머무는 시간과 속도 조절은 나에게 달려 있다는 소리다.


결국 스스로 당당해지고 스스로 상황을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의 균형 경계를 어느 쪽으로 끌고 가느냐에 달렸다. 외상 후 성장(post-traumatic growth)을 할 수 도 있고 외상 후 스트레스에 침잠될 수 도 있다. 대부분 역치의 한계가 낮아지는 쪽으로 변형되기 십상이다. 이 경계를 뛰어넘는 과정은 인고의 시간이 개입되어 있어야 가능하고 역경과 시련의 상황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긍정적 마음 변화가 반드시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인데, 이 시간과 과정을 무사히 건너기가 쉽지 않다. 약해질 대로 약해진 심신 상태로는 긍정적 마인드가 자리잡기 힘들다.

상처로부터 회복할 때 긍정적으로 바뀌게 하는 동력이 필요하다. 바로 움직임이다. 실행이다. 움직인다는 것은 이미 행동을 추론하고 고민하고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계획을 세웠기에 가능하다. 움직임은 최종 산물이다. 목표를 향해 집중하고 에너지를 쏟아부을 자세를 고쳐 잡는 일이다. 어떤 일이 됐든 일단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움직여야 한다.


시련을 시련이라 여기지 않고 충격을 충격이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상황은 나에게 시련이 될 수 없고 충격이 될 수 없다. 현실을 담담하게 보는 무딘 감각과는 다르다. 상황을 전반적으로 펼쳐보고 조망하며 방향을 설정해 나갈 수 있는 심미안을 가진 자만이 헤쳐나갈 수 있는 여유의 단초다.


이 여유는 어디서 오는가? 경험해본 자 만이 가질 수 있다. 손톱이 빠지도록 흙벽을 긁어본 사람만이 벽에 물을 뿌릴 줄 알고 시궁창에서 나는 냄새만으로도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마른땅에 놓을 줄 안다. 세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자는 많은 경험을 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더 많은 경험을 해봐야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변수에 대한 대응을 빠르고 쉽게 할 수 있다. 


좌절과 시련을 회복과 긍정적 변형의 기회로 받아들일 때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다. "배 부르고  등 따뜻하니 할 수 있는 소리"라고 치부할 수 도 있다. "영하 10도 엄동설한의 길거리에 나 앉아봐도 그런 소리가 나올 수 있을까?"라고 되물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상황에 무릎 꿇고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어떻게든 그 힘든 상황을 버텨내고 이겨내게 되면 운신의 폭이 좀 더 커져 있음을 알게 된다. 조금 더 줄일 줄도 알게 되고 멈출 때를 알게 되며 지를 때를 알게 된다. 그렇게 될 때 좌절과 시련은 더 이상 아무 의미 없는 상황으로 바뀌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저 여러 상황 중 거쳐 지나가야 하는 순간의 시간이었음을 눈치채게 된다. 그 순간을 눈치채게 되면 세상사는 일에 헛헛한 웃음을 지어 보일 수 있다. 그렇게들 사는 것임을 알게 된다. 잠시 생명의 막으로 가두어 놓았다 천지자연으로 돌아가는 과정인데 낙담하며 아등바등 살 일이 아니었음을 알게 될 때 폭설처럼 온몸을 뒤덮는 깨달음이 되고 화산 같은 열기로 눈길을 녹이는 열정으로 삶을 바라보게 된다. 산다는 것은 그렇게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다시 하나가 되는 흥미진진한 확률게임 속을 거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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