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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Jan 03. 2023

이름이라는 상징

살면서 같은 이름의 사람을 만나는 일은 흔치 않다. 특히나 비즈니스 관계에서 만나게 되는 경우는 드물고 흔히 회자되는 연예계나 정치계에 등장하는 동명이인들이 간혹 있을 터다. 그 동명이인들의 위상이 좋으면 괜히 자신의 심상도 훈훈해지지만 안 좋은 이미지와 나쁜 사건과 연관되어 이름이 등장하면 수치심까지 유발한다. 


네이버 검색창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보라. 몇 명의 동명이인이 등장하는가? 내 이름만 해도 32명이나 검색되어 나온다. 동명이인이 수백 명은 될 터이지만 콧방귀나 뀐다는 사람들이 자신의 프로필을 등재했을 터다. 휴대폰이 등장하기 전, 공중전화박스에서 전화를 걸던 시절에는 전화박스에 두꺼운 전화번호부가 걸려 있었다. 공공기관 전화번호가 기재되어 있는 것은 물론 개인 이름이 전화번호 옆에 깨알같이 기재되어 있었다. 요즘 같으면 개인정보 노출로 소송감이었겠지만 그때는 그랬다. ㄱ,ㄴ순서로 나오는 이름에 동명이인은 말 그대로 수백 명이 나왔다. 네이버에 내 이름과 동명이인으로 검색되어 나오는 인물 중에 제일 알만한 사람은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을 역임하셨던 분이 계셨는데 2006년 작고하셨다. 그리고는 야구선수로 두산에서 활약하다 현재 코치를 하고 있는 이종욱이 있다. 나머지 이종욱은 대부분 대학교수이거나 의사, 법조인 등등 이시다. 동명이인으로 걸출한 인물이 없어서 조금 아쉽기도 하고 내가 그 역할을 못하고 있어 미안하기도 하다. ㅎㅎ


나는 최근에 나와 이름이 똑같은 동명이인을 2명 만났다. 1명은 알게 된 지 꽤 오래되었다. 업무상 만나게 된 사람으로 언론사에 근무하고 계신다. 다른 1명은 내가 자연과학공부를 하러 다니는 '박문호의 자연과학세상'단체에서다. 아무래도 동명이인을 만나면 본관이 어디인지, 이름에 쓰인 한자는 어떻게 되는지 묻게 된다. 2명 모두 나와 본관이 같거나 같은 한자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한자까지 같은 사람은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이름의 한자까지 같다면 마주친 눈길이나 마주 잡은 악수에 힘이 더 들어갔을 것이 틀림없다. 한자까지 같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기게 되는 심사다.


회사에도 나와 동명이인이 지금은 1명이 있다. 같은 이름의 직원이 3명이나 있었는데 1명은 회사선배로 정년퇴직을 하셨다. 항공기 정비가 주 업무셨는데 퇴직 전에 가끔 통화하곤 했다. 항공기 부품 관련 회사 이메일이 나에게 잘못 오는 경우가 간혹 있기 때문이었다. 이메일을 회송해주면서 통화를 하며 웃곤 했던 기억이 새롭다. 아직 같이 근무하고 있는 또 다른 동명이인은 조종사시라 업무상 주고받는 메일이 많지 않아 나의 이메일로 잘못 오는 경우는 거의 없어 통화할 일은 없다.


똑같음에 대한 거부감일 것이다. 이름이 같다는 것은 나의 아바타 같은 존재일 것 같은 착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 아바타 같은 동명이인이 사회적으로 잘 나가는 명성을 지니고 있다면 그나마 일부러라도 아는 체를 할 텐 지만 그저 평범한 사회인이라면 반가운 척 인사하는 정도로 끝나고 만다. 동명이인이 서로 알게 된다고 해서 관계를 친밀하게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어려울 듯하다.


한때 영화로 만들어졌고 현재까지 뮤지컬로도 계속 공연이 되고 있는 로맨틱 코미디 '김종욱 찾기'가 있다. 여주인공이 찾는 추억의 첫사랑 이름이 김종욱이다. 누구나 간직하고 있을 첫사랑의 상징적 이름으로 '종욱'이 등장하고 있어 은근히 가슴 뿌듯하다.

이름이란 그런 것이다. 상징과 이미지가 혼합되어 정의 내려진 대상의 부름이다. 그렇다고 규정된 개념이 이름이다. 이 이름은 불려야 가치를 갖는다. 불리고 호명되지 않으면 존재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이름을 부여받는 것은 세상의 존재로 등장했음을 확정 짓는 일이다. 이름을 짓는다는 일은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어느 누구의 이름도 그냥 마구 만들어내지 않았다. 부모들이 심사숙고하고 그래도 안되면 작명소라도 찾아가서 좋은 이름을 지어온다. 아이의 이름에 아이의 운명이 달려있다. 존재의 형상에 평생 불려질 상징의 단어다. 이름의 대상은 평생 이 그 이름을 듣게 되니 이름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이상할 것이다.


요즘은 예쁜 한글이름을 많이 볼 수 있다. 아직은 한자의 획과 부수를 따지는 한자 조어적 작명이 건재하기는 하지만 글로벌화되어 가면서 영어식 중의를 포함한 이름들도 있다. 이름을 짓는데도 사회적 문화적 배경이 반영된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가문의 돌림자를 이름 짓기의 기본으로 사용했지만 그 추세는 시들해져 왔다. 한정된 돌림자를 쓰다 보니 괜찮은 이름을 조합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주변을 둘러봐도 20~30대에는 남자의 경우 '민준' 여자의 경우 '현아' '서현'등의 이름을 많이 볼 수 있고 40~50대로 넘어가면 남자의 경우 '현우" 여자의 경우 '은경' '은영' '경희'라는 이름도 많이 들을 수 있는 이유다. 시대를 탄다는 것이다. 물론 작명소에서 천지기운을 읽고 만들어놓고 돌려쓰는 이름의 영향이 컸다는 것도 눈치챌 수 있다.


이름에 사람의 운명을 담기보다는 불리기 쉽고 예쁜 이름 쪽으로 선회되는 듯하다. Naming이 갖고 있는 속성을 보여준다. 이름 지어져야 존재로써 현실에 등장을 하고 그 존재의 형상에 각인된 이미지를 심어주는 게 이름이다. 자기 이름을 불러보고 그 이름에 내재된 뜻대로 행동하고 실천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예쁜 이름이라고 자부하면 나의 삶도 이름에 걸맞게 예쁘게 살고 있는지 되돌아보자. 


김춘수 시인의 '꽃'의 시구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처럼 대상은 이름으로 명명되어야 존재의 가치가 생긴다. 그대 이름을 불러봅니다. 그대 이름을 꽃처럼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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