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hengrin Jan 05. 2023

되살아나는 전철 안 마케팅 행위

전철을 교통수단으로 이용하다 보면 보게 되는 독특한 상황들과 마주하는 경우가 있다. 출퇴근 시간에 보게 되는 상황이 다르고 평일 낮에 이용할 때 다르며 주말에 이용할 때 또 다른 모습들을 보게 된다. 전철의 혼잡도와 이용하는 사람들의 연령층에 따른 상황 속에서 복잡하게 계산된 행동들이 눈에 띈다.


바로 간혹 전철 안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구걸하는 사람, 그리고 계절별로 장갑이나 팔토시 등을 파는 잡상인들의 모습이다. 근래에는 지하철경찰대가 수시로 순찰을 돌고 있어 승객들에게 피해를 주거나 짜증 나게 하는 일들은 대부분 사라졌다.


예전에는 선교하는 사람들이 때를 가리지 않고 전철에서 큰 소리로 유일신의 목소리를 대신한다고 하지만 쌍소리 듣고 다음칸으로 옮기는 경우가 많았다. 선교가 아니고 오히려 종교에 반감을 갖게 하는데 일익을 하고 있는 듯하여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개신교의 특정 종파가 가지고 있는 영업스타일이겠지만 막무가내로 큰소리로 자기주장을 편다. 혼잡한 출퇴근길 전철 안에서 듣게 되면 짜증이 먼저 난다. 그나마 최근에는 거의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을 보니 욕먹고 있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다.


또 하나, 가끔 구걸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이 부류의 사람들은 아주 혼잡한 출퇴근시간에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사람틈을 헤집고 다니기도 어렵거니와 간절한 눈길을 마주해야 그나마 동전이라도 건네받을 텐데 그러기에는 혼잡이 만만치 않다. 구걸하는 사람들이 주로 낮시간의 전철을 활용하는 이유다. 

이 구걸하는 모습도 최근에는 거의 보지 못하다가 지난 주말 점심식사 약속도 있고 서점에도 들를 겸 시내에 나올 일이 있어 전철을 탔는데 2명이나 목도했다. 한 명은 외모로 보건대 중학생 정도 되는 듯 한 청소년이었고 또 다른 한 명은 70대를 넘기신듯한 어르신이었다. 토요일 낮 10시 반정도에 탔으니 다소 한산한 전철 안이었다. 간혹 서있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창문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모습이 사선을 그리며 보일 정도였다. 적막한 분위기에 전철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지배하고 있다. 전철이 역에 서서 승객을 태우고 문이 닫히고 서서히 출발을 하자, 키 작은 청소년이 종이를 한 뭉치 들고, 앉아있는 승객들 무릎 위에 한 장씩 놓으며 전철칸을 돈다. 옷차림은 깔끔하다. 단지 종이쪽지만을 승객들 무릎에 놓을 뿐 어떠한 말도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는 다시 돌며 뿌려놓은 종이쪽지를 회수한다. 가만히 지켜본다. 내가 탄 전철칸에서 동전이라도 종이쪽지와 함께 건네는 승객은 아무도 없었다. 나 역시 지갑에 손을 가져가지 못했다. 무릎에 놓고 간 종이쪽지를 내려다본다. "한쪽 다리를 다쳐서 철심을 박았는데 일을 못하는 상황이라 수술비가 없어 도움을 청한다"는 내용이다. 그렇게 안타까운 사연의 청소년은 다음칸으로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70세를 넘기신듯한 어르신이 전철칸을 돌고 있다. 이 분 역시 말끔한 차림이시다. 걸음걸이가 약간 불편한 듯 보였으나 지팡이를 짚지는 않으셨다. 이 분은 일일이 승객 앞에 서서 도움을 호소하신다. 특히 여성 승객들에게 집중적으로 호소하시는지 오래 서 계신다. 내 옆좌석에 앉으신 여성분 앞에서도 계속 서 계시자 할 수 없다는 듯 1천 원짜리 한 장을 지갑에서 꺼내 건네주신다. 옆좌석에 계신 분한테 도움을 받아서인지 내 앞은 그냥 지나쳐 간다. 


이러한 모습을 볼 때마다 무언가 가슴에 돌덩이 하나를 안고 있는 듯하다. 웬만하면 천 원짜리 한 장이라도 쥐어주려고 하는 편이지만 이러한 구걸행위에는 손이 가지 않는다. 구걸에 웬 방법이 있고 스타일이 있을까만은, 오죽하면 그렇게라도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을까만은, 그래도 한 푼이라도 더 도움을 받고자 한다면 반드시 도움의 손길을 내민 사람에게 무언가를 건네주는 것이 있어야 덜 미안하고 더 안심시키지 않을까? 사탕하나 껌 한 통이라도 내밀면 어땠을까? 적선행위가 아니고 물건을 산 것이라고 위안을 갖게 할 수 도 있었을 것을.


이 마케팅 수법은 선술집을 돌며 장미꽃이나 초콜릿을 파는 행위가 적절히 잘 먹히는 방법의 유용일 수 있다. 내가 전철로 출근하는 구간에 지난해부터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서 은근히 걱정되고 있는 구걸하는 장애인 있다. 이 사람은 비닐봉지에 큰 눈깔사탕을 넣어오기도 하고 어느 날은 정말 허접하고 말도 안 되는 작은 장난감을 넣어오기도 한다. 구걸한다기보다 판매행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사람이 오히려 더 신경이 쓰인다. 간혹 지폐 한 장에 사탕 하나를 집기도 하고 비닐봉지에 손을 넣고 잡히는 데로 들고서 천 원짜리 한두 장을 쥐어준다. 사무실에 와서 펴보며 어린이용 소꿉장난할 때 쓰는 가짜 립스틱일 때도 있다. 펴보는 순간 웃음이 피식 나지만 그래도 비용을 지불한 상품으로의 가치보다 마음의 가치가 큰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그 모습을 보지 못한 지 꽤 되어서 불안하지만 영업장소를 다른 전철이나 다른 시간대로 옮겼을 것이 틀림없을 거라 자위해 본다.


'라테는 말이야!' 시절에는 버스터미널에서 버스출발 전에 깍두기 아저씨 한두 명이 올라와서 번호표 같은 것을 돌리고 대충 호구될만한 사람의 번호를 부른 다음 "축하합니다. 당첨됐습니다."라고 하고 "물건을 건네준 다음 물건을 싸게 파는데 당첨되었으니 사야 한다"라고 협박을 하여 강매를 하기도 했다. 사기와 진배없는 웃기는 마케팅기법이 아닐 수 없다.


연초가 되어 훈훈하고 마음 따뜻한 소식들을 언론들이 전하자고 해서 그런지,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기부하는 사람들의 소식, 돼지저금통 들고 경찰서를 찾아오는 어린이들의 모습, 걸음걸이가 불편해 횡단보도를 다 건너지 못한 어르신을 업어서 건네주는 청년들의 모습 등등이 알려진다. 작고 사소한 돌봄과 배려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세상이다. 그만큼 삭막하고 건조하게 살아왔음을 알게 된다. 가끔은 생활 속에 접하게 되는 가난에도 눈을 돌려볼 일이다. 굳이 매번 매일 할 것까지는 없다. 어쩌다 한번 만나게 되면 그저 천 원짜리 한 장이라도 쥐어줄 수 있으면 그것으로 된 거다. 그렇게 서로 살아내고 살아지고 보듬고 가는 것, 모두 잘 살고 모두 행복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평균을 향해 나아갈 수 있으면 옳은 길이 아닌가 한다. 작은 위안 작은 손길이 이 추위를 녹이는 난로가 될 것이다. 광화문에 있는 사랑의 온도탑 눈금은 그 높이가 높아지고 있을까?

작가의 이전글 세상이 바뀌는데 나만 모르고 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