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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Jan 17. 2023

매일 시험에 들게 하옵시고

우리는 매일 시험을 본다. 아니 매 시간 시험을 보고 매일 매주 매월 매년 시험을 보면서도 시험을 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학창 시절, 시험 보는데 질려버렸기 때문에 시험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킨다. 시험은 이미 학교 다닐 때 끝냈고 다시는 쳐다도 보기 싫은 행위로 간주해 버린다. 심지어 학교를 졸업하면서 다시는 시험을 보지 않아서 속 시원하다고 한다. 


그래서 망했다.


시험을 시험답게 생각해보지 않았기에 망한 것이다.


학창 시절의 시험은 강제적 행위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꺼내놓고 평가받는 일이다. 이 평가에 순위가 매겨지고 점수가 매겨져 몇 점짜리 인생으로 낙인찍히는 수단으로 전락했고 그 숫자의 오욕과 치욕과 모멸감에 치를 떨어야 했다. 이 숫자에 만족하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밖에 없기 때문이다. 전교 1등밖에 없다. 이 열등감과 열패감의 감정은 사회에 나와서도 마찬가지로 작동한다.


기업에서는 사주만이 1등이고 나머지는 기타 등등이다. 사장이고 부사장이고 임원이고 필요 없다. 사주 이외에는 그저 기타 등등일 뿐이다. 그럼에도 자기가 2등인 줄 알고 넘버 3인 줄 착각한다.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 "머슴을 키워 가 등 따숩고 배부르게 만들믄 와 안되는줄 아나? 지가 주인인 줄 안다. 정리 해고 별거 아이다. 누가 주인인지 똑똑히 알려주는 기다. 정도 경영이라 캤나? 내한테는 돈이 '정도'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딱 여기까지다. 모든 사주가 다 그런 것은 아닐 테지만 말이다.


학교에서의 등수는 여전히 꼬리표가 되어 등 뒤에 따라붙어 다니며 열등감을 부채질하고 그 꼬리표를 떼어내고자 발버둥 치는 게 현실의 모습이 아닌가? 세상을 너무 비관적으로 보고 있는가?


우리 사회가 시험을 잘못 본 때문이며 시험을 시험에 들게 한 때문이다. 


평가를 하고 순위를 매기는 교육제도하의 시험은 강제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 어쩔 수 없다. 빠른 효율성을 위해 도입한 제도인지라 장점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강제적 속성에는 자발적 성취감을 앗아가 버리는 단점이 내재되어 있다. 시험이 끝남과 동시에 백지장처럼 머릿속이 하얗게 세팅이 된다. 머릿속에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다. 정답만 찾는 쪽으로 방향이 정해지다 보니 정답이 아닌 것은 모두 틀린 것으로 각인되어 버린다. 우리 사회가 이분법적으로 분열되어 가는 현상의 단초는 바로 학교 다닐 때 시험 보는 습관이 내재되어 있던 것이 발현되는 모습이지 않을까 한다.


다시 돌아가 시험을 뒤집어보자.

시험은 인출하는 행위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겉으로 드러내는 표현이다. 알고 있다는 것은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 누가 더 기억을 많이 하고 있느냐가 시험의 결과를 더 잘 만들어낼 수 있다.

"시험 울렁증이 있어서, 알고 있는데도 제대로 못 봤다"라고?

핑계일 따름이다.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확실히 적어내지 못했을 뿐이다.


기억을 인출하는 행위 즉, 시험의 방법을 들여다보라. 책을 덮고 강의노트를 뒤집어 놓고 공부한 내용을 머릿속으로 떠올려 반추해 보라. 얼마나 재생해 낼 수 있는가? 배운 내용을 가장 빨리 피드백해 볼 수 있는 방법은 '남에게 가르쳐보는 일'이다. 타인에게 설명하고 가르친다는 것은 역시 내가 알고 있는 것을 꺼내는 인출 행위다. "나이가 들어서 듣고 나서 돌아서면 바로바로 까먹는데 리뷰를 해보라고? 미친 거 아냐?"라고 되물을 수 있지만 이런 변명은 꼰대의 게으름을 드러내는 노망일 뿐이다.


바로바로 까먹는 것은 새롭게 들은 내용을 걸려들게 할 '이전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머릿속에 가두어 놓을 때는 미끼가 있어야 하는데 머릿속이 텅 비어 있으면 아무리 새로운 고기와 정보와 달콤함이 들어와도 머물지 못한다. 새로운 내용이 걸려들지 않고 밀물처럼 빠져나간다. 기억은 반드시 '이전 기억'의 흔적을 통과해야만 저장할 수 있고 인출할 수 있다. 미끼도 던져놓고 그물망도 촘촘히 정비해야 하는데 이런 노력은 하지도 않고 그저 나이 탓만 한다. 분명 나이 들면 기능이 떨어지는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그 속도를 늦출 수 있음도 자명하다.  


그래서 바로 매 시간 매일 매주 매월 매년 시험을 보는 일이다. 책을 덮고 업무를 잠시 미뤄놓고 머릿속으로 정리를 해서 인출을 해보는 것이다. 매일 일기를 쓰듯이, 매일 업무일지를 쓰는 것이 바로 기억을 정리하여 인출하는 시험을 보는 일이다. 사실 산다는 것 자체가 매 순간 시험을 보는 일이었음에도 용어에 매몰되어 가려져왔고 묻혀왔고 외면받아 왔다. 


"매일 시험에 들게 하옵소서" 기도를 해야 한다. 그래야 욕망이 생기고 간절함이 생기고 절박함이 떠오른다. 그래야 벗어나고 싶고 이루고자 싶어 진다. 시험과 맞닥트린다는 것은 마음을 먹는 일이다. 시험은 지긋지긋한 열등감의 확인이 아니라 나를 알고 나를 찾아내 삶의 목표를 정하게 하고 이루어내는 자발적 욕망의 행위로 만들어야 한다. 세상을 보는 시선의 방향이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 시험은 그 방향을 정하는 도구이자 세상으로 향하는 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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