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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Jan 19. 2023

말하는 저주

인간은 '말하는 축복'과 '말하는 저주'를 동시에 갖고 태어났다. 말이라는 언어를 통해 의사전달을 하는 유일한 개체가 인간이다. 말은 상징이다. 


"이 말은 그 말이 아니고 저 말인데  그 말이 이 말인 줄 안다"


얼마나 놀라운가? 한 문장 속에 말이 다섯 개가 등장하는데 그 다섯 말이 다 다른 말임을 안다. 이런 놀라운 상징의 전환을 이루어냈기에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 냈다. 말이 신이다.


개체마다 단어를 입혀 상징을 개념으로 만들었다. 단어로 이름을 부여받지 못하는 개체는 존재 의미를 가질 수 없다. 단어에는 행동과 의미, 관계가 동시에 작동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의사소통은 단어만으로도 가능하다. 단어로 이름 붙여 놨기에, 그것은 그것으로 정의되어질 수 있다. 단어가 맥락으로 나열되어 문장이 되므로 굳이 문장의 구성이 완벽할 필요도 없다. "이렇게쓴고다해서말을알아못듣는이것이아니라싶지알고않을뿐이다."라고 엉망진창으로 나열해도 앞뒤 문장의 단어를 이어서 올바른 문장으로 정확히 해독을 해낸다.


또한 단어에는 녹아있는 뉘앙스가 있다. 사회적 정서도 포함되어 있다. 감정을 만들고 행동을 유발한다. 단어의 힘은 이렇게 엄청나다. 인간의 시작이자 끝이 말이자 언어이다. 그래서 말은 축복이자 저주다.


말은 혼자 하면 독백이고 타인과 하면 대화다. 독백은 머릿속에서 자기와 대화하는 것이다. 자기라는 아바타를 상정해 놓고 중얼거리는 거다. 독백도 대화의 상대가 '자기'로 상정되어 있다. 말이 사회적 진화 과정에서 등장한 도구이기에 그렇다.


'대통령의 글쓰기'의 강원국 작가는 "대화는 말하는 사람의 수사학이 아니고 듣는 사람의 심리학이다"라고 했다. 대화 속의 단어가 갖는 의미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관계가 다르고 경험치가 다르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단어에는 시대상조차 반영된다. 의미가 변한다는 것이다. 문해력의 차이는 여기에서 나온다. 같은 단어를 놓고 다르게 해석하는 현상이 벌어진다.

그래서 말의 축복 사례보다는 저주의 말 사례를 더 많이 본다. 최근 누구라고 지칭 안 해도 말의 저주에 걸린 사례를 쉽게 눈치챌 수 있다. 듣는 사람이 오히려 당황하고 낯이 뜨겁다. 왜 타인의 말에 내가 곤혹스러운가? 그는 나를 대신하는 아바타와 같기에 아바타의 말실수는 곧 나의 실수로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뽑지 않았고 내가 선택하지 않았지만 민주적 절차에 의해 앉혀졌으니 믿어주고 밀어주는 게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수준과 나의 아바타 수준이 같아야 하는데 제대로 호환이 안되면 답답해지는 것이다.


말이라는 것은 한순간 훈련하고 연습한다고 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담겨있다. 조폭은 조폭의 언어를 쓰게 되고 선생님은 선생님의 언어를 쓰며 의사는 전문적인 단어를 사용해 대화를 한다. 어쩔 수 없다. 노는 물에 따라 사용하는 말과 언어가 있다는 것이다. 죄지은 범죄자를 심문하는 검사는 용의자를 겁박하고 얼르고 달래는 용어를 써야 한다. "잘못하신 게 있으시면 다 말씀해 주세요?"라고 부드럽게 심문하면 닳고 닳은 범죄자들은 검사를 우습게 여길 것이다. "이 새끼, 너 흉기 휘두른 거 CCTV에 다 찍혔어 인마! 빨리 안 불어 이 짜식이 통닭구이 한번 달려봐야 술술 불지?"라고 치고 나가야 그나마 조서라도 쓸 수 있다. 그 세계의 말과 언어는 그래야 한다. 


평소 생활이 언어 습관으로 굳혀진다. 평생을 써온 언어 습관이 생활에 그대로 농축되어 있고 그 언어로 평생 살았는데 한 순간 말과 태도를 바꾸기는 힘들다. 지금 그 사람의 언어가 그 자리에 맞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싸울 때는 욕을 하며 싸우는 것이 맞다. 싸울 때 말없이 사시미칼로 복부를 후벼 파는 인간이 제일 무섭기는 하지만, 지금이 싸울 때 말을 써야 하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능력과 가치판단은 할 줄 알아야 한다. 때와 장소에 맞는 말을 하지 못하고 엉뚱한 소리를 하면 그 천박함은 부끄러움으로 드러난다. 말하는 당사자는 그것이 그것인지조차 모르는 게 문제다. 몰랐으니까 그렇게 내뱉었겠지만 이제 부끄러움은 듣는 사람의 몫이 되어버린다. 말은 타인이 했는데 부끄러움은 내 몫이다. 


화장실에 가서 귀를 씻어낸다. 그래도 이미 떠도는 말의 유령은 사라지지 않는다. 말의 저주는 그렇게 온몸을 감싼다. 초신성 폭발로 인한 중력파가 우주를 떠돌아 흔적을 남기듯이 우주에 새겨져 버린다. 감춘다고 감추어지지 않고 지운다고 지워지지 않는다. 장자는 장천하어천하(藏天下於天下 ; 천하를 천하에 숨긴다) 하기도 했자만 범인들은 쉽게 지울 수 없고 감출 수 없다. 


타인의 말을 경청하라고 귀는 두 개이고 나의 말은 적게 하라고 입은 하나라고 했다. 경청에도 종류가 있음을 깨달았다. 무조건 잘 들어주는 것만이 미덕이 아님도 알게 됐다. "실수였다"라고, "그런 뜻과 의도가 아니다"라는 변명은 소용이 없다. 왜? 말은 듣는 사람의 심리라고 하지 않았나? 이미 내뱉어진 말은 주워 담을 수가 없다. 그래서 신중하라고 인류 역사 속 사례가 그렇게 교훈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음에도 인지하지 못한다. 책을 안 보고 공부를 안 하기 때문 일터다. 자기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스스로 깨쳐야 한다. 그 자리가 양면의 칼날 위에 서 있음에 섬뜩 놀라야 한다. 그래야 조심하게 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된다. 


이런 헛소리를 하고 있다는 자체가 허무하긴 하다. 이런 것을 지적질할 때가 아니다. 남들은 이미 철갑을 두르고 하늘을 날아 우주로 가고 있는데 우리는 이제 방석 펴고 앉을자리 고르고 그것이 최고인 줄만 아는 형국이다. 이것이 우리의 수준이라고 자책하기에는 너무 한심하지 않은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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