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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Feb 09. 2023

한 사람을 위해 국 끓이고 밥 하기

1년에 딱 한 끼, 한 사람을 위해  밥하고 국을 끓입니다.


눈치채셨겠지만 와이프 생일날이 되면 제가 하는 유일한 이벤트입니다. 올해로 결혼한 지 딱 30년이 되는 해지만 이렇게 와이프를 위해 아침상을 준비한 지는 10년 밖에 안 됐습니다. 그전에는 어머니께서 챙겨주셨거든요. 와이프는 결혼하면서부터 시어머니를 모셨습니다. 신혼 때부터 시어머니와 한집살이를 했으니 그 심정이 오죽했겠습니까? 더구나 어머니는 제가 3대 독자였는데 결혼 바로 전 해에 아버님께서 돌아가셔서 홀어머니셨습니다.


'3대 독자를 둔 홀어머니'. 이 한 문장이 모든 시어머니의 끝판왕을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그 세월을 와이프는 20년을 견뎌주었습니다. 그러다 10년 전 어머니께서 치매증상으로 인해 요양원 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와이프의 시집살이는 막을 내렸습니다.


4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집에 계실 때에는 와이프 생일날이면 잡채도 만드시고 미역국도 끓여주시고 직접 챙겨주셨습니다. 그러던 것이 어머니께서 요양원가신후부터는 와이프 생일상 차리는 것은 저의 임무가 되었습니다. 그래봐야 미역국 끓이고 쌀 씻어 전기밥솥에 넣는 일이 전부입니다. 어머니처럼 잡채도 못 만들고 소고기찜도 못 만듭니다. 와이프에게 미안합니다. 365일 중 유일하게 그것도 딱 한 끼를 챙기는 정도이니 감히 이렇게 글로 자랑질하는 것 같은 분위기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이것마저도 안 하는 남자 인간들이 태반일 거라는 위안도 한편에 있긴 합니다만 반성해야 할 일임은 분명합니다. 꼭 생일날이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와이프와 가족을 위해 집에서 하는 식사 정도는 챙겨줄 수 있어야 함에도 마치 주방일은 여자들의 몫인양 선을 그어놓고 있었던 성리학적 사고를 아직도 하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하지만 몇 년 안 남았습니다. 와이프도 학교 생활을 하고 있다보니 제가 먼저 정년퇴직을 해야 합니다. 집에서 식사 차림을 맡아서 해야 할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겁니다. 정신 차리고 요리하는 것도 하나씩 하나씩 배워야 할 때가 됐음을 직감합니다.


그러고 보니 1년에 내가 몇 번이나 주방에서 밥을 해서 끼니를 챙겨 먹었나 되돌아보면, 뭐 숫자를 셀 수가 없습니다. 부끄럽지만 너무 많아서가 아니라 아예 없어서입니다. 유일하게 와이프가 출장을 가거나 어쩌다 며칠씩 여행을 가는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전날 먹던 남은 밥을 모아 볶음밥을 하고 계란 프라이도 하고 햄이나 소시지도 구워 먹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딱 한 두 끼 정도입니다. 나머지는 밖에서 먹고 가거나 배달음식을 시키고 맙니다. 와이프가 출장 간 날에는 집에 아이들에게 전화해서 뭐 먹고 싶냐고 물어보고 식당으로 나오라고 해서 저녁식사를 해결합니다. 그나마 이제는 아이들이 커서 집에 있는 경우가 거의 없으니 끼니 때우는 식사는 각자 알아서 합니다.

집에 혼자 있으면, 무언가 식사다운 식사를 준비하기가 참 애매하긴 합니다. 혼자 먹자고 쌀을 씻어 밥을 하긴 그렇고 하니 눈에 딱 보이는 것이 라면입니다. 간단히 한 끼 때울 수 있는 최고의 해결방법이긴 합니다. 더구나 요즘은 햇반도 있어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려주면 밥솥밥 뺨칠 정도로 맛있는 한 끼 밥이 됩니다. 또한 설렁탕에서부터 온갖 찌개류 들이 포장되어 판매되고 있어 냉장고만 열면 여러 가지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일일이 물을 끓이고 파를 썰고 두부를 준비하고 간을 보며 소금과 간장을 더 넣을 것인지 고민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다 보니 요리를 하는데 실력이 있네 없네, 나는 해본 적이 있네 없네를 물을 필요도 없습니다. 참 편리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음식을 준비하는 과정이 생략되다 보니 요리에 대한 흥미와 재미도 없어졌습니다. 보편화된 입맛에 길들여져서, 국이 끓을 때 국자로 떠서 간이 제대로 되었나 호호 불며 감미를 하는 긴장감도 없어졌습니다. 그냥 끓기만을 기다렸다가 국그릇에 퍼담는 것으로 식사준비를 마치게 됩니다. 누군가 맛있게 먹어줄 거라는 기대감도 없어집니다.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정성을 들인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저 한 끼 때우는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이 와이프 생일날입니다. 그래서 어제저녁 모임약속에 나갔다가 저녁식사만 간단히 하고 와이프 생일준비해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집으로 향합니다. 정육점이 있는 동네 마트가 일찍 문 닫을까 봐 신호등마다 걸리는 버스 차선에 초조해집니다. 그렇게 문 닫으려는 동네 마트에 들러 양지 소고기를 작게 썰어 국거리로 준비하고 미역을 삽니다. 아시겠지만 미역은 건조된 것을 물에 넣으면 양이 엄청나게 불어 나므로 양 조절을 잘해야 합니다. 그렇게 집에 와서 미역을 물에 담가놓고 냄비에 소고기를 넣고 볶습니다. 미역국에는 들기름을 넣고 미역을 살짝 볶습니다만 소고기를 볶을 때 참기름을 살짝 넣고 볶아줍니다. 소고기가 핏기가 다 빠질 때쯤에 불린 미역을 건져 소고기와 함께 조금 더 볶아줍니다. 그리고 물을 넣고 한참을 끓인 후에 마늘과 간장과 소금으로 간을 합니다. 미역국은 오래 끓일수록 맛이 우러납니다. 한 40분 정도만에 그럴싸한 미역국이 완성되었습니다. 미역국에는 뭐 잘못 끓였네 잘 끓였네 할 필요가 없습니다. 미역과 소고기가 모든 걸 다하기 때문에 넣고 끓여주는 것으로 주방장의 역할이 끝나면 그런대로 먹을 만한 국이 됩니다. 주방장은 그저 국자 들고 소금을 더 넣을 것인지, 간장을 더 넣을 것인지, 마늘을 넣을 것인지 간 맞추는 일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아침 출근 전에 전기밥솥에 쌀을 씻어 넣고 '취사'버튼을 누릅니다. 출근 시간이 서로 달라 같이 아침식사를 할 수는 없습니다. 식탁에 차려놓지도 않고 나옵니다. 그저 생일을 위해 준비해 놓은 것 만으로 미안함을 대신합니다.


출근해서 생일축하 문자를 보내고 저녁에 줄 케이크와 생일선물도 준비합니다. 물론 생일선물은 최근에는 현금으로 바뀌었습니다. 가방, 신발 필요 없답니다. 그냥 현금으로 달랍니다. 그렇게 와이프 생일 이벤트가 저녁에 있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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