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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Feb 23. 2023

정의를 잘 내려야 정의가 바로 선다

제목을 써놓고 나니까 말장난 같다. 오늘은 제목을 먼저 쓰고 내용을 줄줄이 이어가보자.


단어는 시각적 단어가 있고 청각적 단어가 있다. 단어는 상징이다. 실체가 아닌 현상이고 약속이다. 그러다보니 단어의 정의가 명확해야 정확한 의사전달과 표현이 가능하다. 또한 단어에 대해 모든 사람의 이해가 같아야 한다. 누구는 커피를 커피라하고 누구는 녹차라고 한다면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 이 단어는 같은 언어를 쓰는 문화권에서만 통용되는 한계도 있다. 요즘 한창 마트를 점령하고 있는 딸기라는 이름의 채소(과일이 아님. 과채류라고는 함)를 영어권에 가서 아무리 한국말로 딸기를 달라고 해봐야 전혀 통하지 않는다. 실물의 딸기를 손으로 가리키며 딸기라고 한국말로 해야 그때서야 "oh! strawberry"라고 알아듣는다. 제스처 상징이 언어를 우선한다. 


알아듣고 이해한다는 것은 단어를 알아야 가능한 다음단계이다. 이해를 먼저 하는 것이 아니고 단어를 먼저 알아야 하는 위계 순서가 있다는 것이다. 일단 단어를 많이 아는 게 핵심이다. 단어를 많이 알면 단어와 단어 사이를 연결하는 능력이 생기고 그 능력의 발현이 이해로 오는 것이다. 이해는 하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햇살이 창문을 넘어 방안에 스며들듯이 단어들의 연결을 통해 그냥 오는 것이다. 대화나 글은 바로 이 단어의 나열을 앞뒤 문맥에 맞게 잘 연결해야 한다. 단어들을 중구난방으로 연결하여 쓰거나 말하면, 무슨 말을 하는지, 무슨 글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말 잘하고 글 잘 쓰는 사람은 바로 단어의 연결을 매끄럽게 잘해서 타인을 설득하고 이해시키는 사람이다.


쓰는 언어가 다르면 생각하는 사고관념 자체가 다르다. 단어가 생각을 만들고 생각이 의식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어의 정의(定義, definition)를 명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의 틀을 만들기 때문이다. 특히 사물의 실체를 명명하는 단어보다는 추상의 개념을 지칭하는 단어의 뜻을 정확히 아는 게 중요하다. 상상을 정의해 같은 의미와 뜻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애매하면 오해를 불러온다. 각자 다른 해석을 내리고 거기에 따라 각자 다른 행동을 하게 하고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한국사회가 격앙된 감정의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단어들의 정의가 명확지 않기 때문으로 보인다. 같은 말, 같은 단어를 쓰고 있음에도 받아들이는 이해와 느낌은 전혀 다르다. 비평은 없고 비난만 있고 토론이 없고 논쟁만 있는 사회가 되어 있다. 

학교 교육에서 단어의 개념을 명확히 가르치는 과정이 빠져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요즘 집에 국어사전이나 영어사전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라. 아마 서재 어느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감히 꺼내보기도 두려운 존재가 되어 있을 것이다. "세상이 어느 세상인데 종이짝 사전을 ㄱ ㄴ ㄷ 찾아가면서 뒤적이고 있어? 네이버나 다음 포털 사이트에 사전 기능이 있는데 무식하게!"라고 할 수 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사전을 검색해 본 적이 언제였나 되뇌어보라. 아마 날짜 기억조차 못할 가능성이 더 크다. 그나마 간혹 영어단어 스펠링이 헷갈려서 영어단어를 찾아보는 경우가 더 많을거다.


우리는 학교 교육을 끝으로 단어 공부하는 것도 종료를 시켜버렸다. 학교 다닐 때 배우고 익힌 단어의 수준으로 평생 대화와 글의 수준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일상적으로 먹고사는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기에 무시되어 왔다. 그러다 자식들과의 대화가 서로 핀트가 안 맞는 것을 눈치채고 같은 단어를 전혀 다른 뜻으로 이해하고 오해하는 현상들이 벌어지면서 문해력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된다. 같은 한국말을 하는 것 같은데 전혀 다른 언어를 쓰는 것 같은 황당함에 직면한다. 


그래서 정의(定義, definition)를 바로 내려야 정의(正義, justice)도 바로 설 수 있음은 참(true)이다. justice의 정의는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다. 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 모두가 지켜야 되는 강제 규범 같은 거다. justice의 정의가 바로 서려면 사회가 지키고 가꾸어야 하는 공동 선에 대한 올바른 definition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바로 사회의 정의는 단어의 명확한 definition에서 오는 것이 맞다. 우리 사회에서의 justice는 내로남불로 갖다 붙이기 나름으로 전락해 버린 듯하여 안타깝기 그지없다. 말과 글이 제 자리에 있지 못하고 허공을 떠돌고 있다. 정의(justice)를 제대로 정의(definition)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자기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벌이는 싸움이기에 정의는 끊임없이 새로운 개념으로 정의 내려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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