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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Mar 09. 2023

봄은 전철역 계단에도 도착해 있습니다

전철역 플랫폼에서 계단을 걸어 올라 지상으로 나온다. 시청역 2호선 플랫폼은 지하 2층에 있지만 깊이가 있어 계단 높이로는 건물 5층 정도는 된다. 30년 이상을 이 계단을 걸어 올라왔는데 매일 올라올 때마다 숨이 가쁘다. 이 정도 높이면 적응을 해도 한참 했을 텐데 30년 이상 올라와도 다리 근육이 기억을 못 한다. 몸이 부실한 건가?


예전에 히말라야와 7 대륙 최고봉을 모두 정복한 탐험가이자 산악인인 허영호 씨와 북한산을 동행했던 적이 있었다. 해외 탐험 원정을 나갈 때마다 회사에서 작은 힘이나마 보탰던 인연으로 부서에서 직원들이 서울근교 등반을 할 때면 가끔 찾아주셔서 발걸음에 힘을 보태 주셨다. 허영호 씨와 같이 북한산을 갔던 때가 20년은 더 지난 것 같다. 토요일에 부서 야유회 겸 등산을 많이 가던 시절이라 북한산 등반코스는 뻔했다. 이북 5 도청 쪽에서 시작하여 승가사를 지나 사모바위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와 구기동 계곡 식당에서 부어라 마셔라 했다. 구기계곡을 올라가며 승가사에 도착하기까지 계속 오르막길을 가야 한다. 한두 번은 숨을 고르고 올라야 승가사 처마밑이 올려다보인다. 당시 허영호 씨에게 한마디 건넸다. "대장님께서는 북한산 정도는 슬리퍼 신고 뒷산 산책 가는 정도 아닌가요?" 그런데 다소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안 그래요. 저도 똑같이 힘들어요. 그냥 참고 버틸 뿐이에요"라고 말이다.


허영호 대장의 당시 그 말이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서 시청역 계단을 오를 때면 위안으로 되새김되고 있다. 세계 최고의 산악인도 북한산 오르는 게 힘들다는데 내가 매일 시청역 계단을 오르며 힘든 것도 똑같은 증상일 거라는 자기 합리화다. 그래도 그 덕분에 시청역 계단을 오르며 창문처럼 바깥입구의 네모진 하늘이 올려다 보이면 숨이 가빠지는 것을 잠시 잊을 수 있고 계단 끝에 올라서면 시원함도 느낄 수 있게 된다.


사실 똑같은 계단을 매일 오르면서 숨이 차는 것은 밤새 잠을 자던 근육들이 제대로 활성화될 틈이 없는 이유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다리근육의 크기를 키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근지구력을 키워야 오래 버틸 수 있는데 이 근지구력은 근육의 크기에 비례한다. 피트니스센터에서 근력 키우기에 돌입한 지 4개월째가 되었는데도 아직도 이 정도면 운동을 게을리하고 있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보여주기식 상체 근력운동을 많이 하고 실제 건강 및 체력에 필요한 하체운동은 소홀히 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돈만 쓰고 헛운동을 하고 있다는 채찍질을 매일 받고 있으면서도 간과하고 있었다. 아니 외면하고 있었다고 하는 것이 맞는 듯하다.


계단 끝에 올라 잠시 뒤돌아본다. 어둠의 동굴을 걸어 나온 느낌이다. 그런데 오늘은 살짝 땀이 밴다.

아! 봄이구나!


똑같은 계단을 매일 오르면서 봄이 계단에도 와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봄이 훅 다가와 있었다는 것을 살짝 땀이 밴 셔츠를 펄럭이며 깨닫는다. 그러고 나니 주섬주섬 봄의 냄새를 찾아 두리번거려본다. 아직 서울의 거리에는 봄이 숨겨져 있다. 서울의 봄은 나무의 물관 안에 숨어있고 목련꽃 털북숭이 갑옷 속에 흰색을 입고 숨어있다. 사무실에 도착하여 첫 차로 마시던 블랙티 대신 지리산 야생녹차의 첫 잎을 제다한 차를 세 꼬집 정도 집어 따뜻한 물어 풀어놓는다. 지리산 산자락 봄의 맛이 입안 가득 담긴다. "그래! 지금 지리산에도 봄이 왔을까?" 궁금해진다. 


부랴부랴 포털 사이트에 검색을 해본다. 아직은 잔설이 남아 있는 지리산 사진들이 더 많다. 지리산 봄소식이 더 많을 것을 기대했는데 아직은 이른 모양이다. 아니 당연하다. 지리산은 남녘에서 제일 높은 산이다. 계곡이 깊고 산이 높으니 아직 봄이 찾아가기에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지리산 아랫마을에서 들려오는 매화의 개화 소식과 동백 소식은 이미 전해 들었다. 곧 봄은 서서히 아랫마을의 쑥을 키우고 산수유에 색을 입히고 계곡을 건너 산등성이에 올라 진달래에 붉은 핏빛색을 쏟아놓을 것이다.


지난밤에 비가 내렸다. 아파트 주차장에 서있는 차량의 앞 유리창과 지붕에 물기가 방울방울 남아 있다. 촉촉할 정도로 내리지는 못한 모양이다. 이 시기에 내리는 비는 숨겨져 있던 골목 안의 잔설을 녹이고 골프장 그린을 녹인다. 움츠려 딱딱했던 것을 부드럽게 풀어주는 따뜻함이 봄의 마법이다. 그래, 오늘 점심식사는 도다리쑥국을 먹으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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