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hengrin Mar 17. 2023

나 세상 떠날 때 태양을 남겨 놓으리

시(詩)를 쓰는 것과 글을 쓰는 것은 같은 행위일까? 생각을 문자로 드러낸다는 행위에 있어서는 같을 수 있으나 굳이 구분한다면 감정이 담기는 형태의 차이이지 않을까 싶다. 글을 쓴다는 것도 생각의 나열을 일목요연하게 끌고 갈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횡설수설해서는 무엇을 전하고 싶은지 제대로 알려줄 수 없다. 시도 역시 생각의 전달이지만 간결과 압축과 은유로 느낌과 감정을 전하는 정서의 박물관이다.


사람은 감성이 풍부해야 자연에 말을 걸 수 있다. 아니 감정이 풍부하면 자연이 내게 말을 걸어오는 것을 알아챌 수 있다. 선택이 삶의 일상인데 선택하는 모든 조건은 감정이 지배한다. 모닝커피를 마실 것인지 말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도 나의 아침 컨디션에 관여하는 감정에서 발원한다. 물을 끓이고 컵에 커피를 담는 행위조차 바로 감정에서 출발한다.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 선택도 잘할 수 있는 이유다.


사람은 감성을 다채롭고 풍성하게 할 수 있는 시기가 있다. 때가 있다는 것이다. 바로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중학생 때까지다. 이 시기가 그 사람의 원형을 결정하는 때다. 한 사람 인생의 방향을 정하는 중요한때다. 이 시기에 아름답고 서정적인 시들을 많이 읽게 하고 외우게 하면 아이들의 심성도 맑게 된다. 이 시기에 휴대폰만 들여다보며 게임을 한 아이와 아름다운 시 몇 편이라도 외우는 아이는 나중에 확연히 다른 삶의 모습을 걷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로 감정의 차이 때문이다.


감정이 풍부해지려면 머릿속에 단어사전인 렉시콘(lexicon)에 아름다운 시어들이 많이 입력되어 있어야 한다. 브레인의 기능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시기에 아름다운 개별 단어들로 머릿속을 채워놓으면 어른이 되어서도 그 단어의 인출과 조합을 잘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어려서부터 책과 시를 많이 읽는 것이 감성을 풍성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어제저녁 자연과학 공부를 하는 모임인 '박문호의 자연과학세상'에서 매주 목요일 zoom으로 하는 온라인 강의시간에 좌장이신 박문호 박사께서 정현종 시인의 '어디선가 눈물은 발원하여'라는 시집을 소개해주셨다. 1년 내내 딱딱하고 복잡한 자연과학 공부를 하느라 경도된 브레인에 한줄기 봄비와 같은 시간이었다. 박문호 박사는 "물리학과 시는 정상에서 만난다. 무시하거나 놓치고 있을 뿐이다"라고 일갈한다. 참으로 그러하다. 들여다보면 같은 맥락을 다른 언어로 이야기할 뿐이다. 대단한 통찰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숨 쉰 횟수가 아니라 숨이 멎도록 놀라운 순간을 만나야 한다"


시의 세계는 자연과학의 세계만큼이나 놀라운 세계다. 느낌의 세계이고 은유의 세계다. 개별 단어와 개념을 재료로 하여 색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용광로다. 자연에 언어의 올가미를 씌워 낚아채는 공간이다. 시인은 바로 자연을 언어로 낚아 올리는 강태공이다.


어제저녁 낭송된 정현종 시인의 '나 세상 떠날 때'라는 시를 소개한다. 이 시를 듣는 순간 한 동안 멍했다. 가슴이 울컥했다.



나 세상 떠날 때 / 정현종


나 세상 떠날 때

나는 내 뒤에 태양을 남겨 놓으리

그 무슨 말 무더기

무슨 이름

그 무슨 기념관 같은 거 말고

태양을 남겨 놓으리

그러니

해가 뜨거나

중천에 있거나

하늘이 석양으로 숨 넘어가며 질 때

그게 내가 남겨놓은 것이라고 기억해 주시기를!


시란 이런 것이다. 감정을 후벼 파고 심장을 들춰내 퍼덕이는 생명을 보여주고 자연을 끌고 들어와 융합시켜 놓는다. 위대한 시인은 자연의 원리를 깨달은 선각자임이 분명하다. 자신이 알게 된 신비의 열쇠를 언어와 글로 타인에게 전하는 선교자다. 자연에 스며들어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녹아들어 용해됨으로써 물아 일치가 되어 새로운 합금으로 변모시킨다.


백팩에 얇은 시집 하나 들어있을 일이다. 그래서 어쩌다 가끔 청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처럼 시집을 들춰내 볼일이다. 그래서 시인의 감성이 봄 아지랑이처럼 책갈피에서 피어나는 모습을 살펴볼 일이다.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안에 있는 존재 자체만으로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새삼 느껴볼 일이다. 그것이 사는 것이고 그것이 사랑하는 일이다. 


박문호 박사께서 추천하신 시집 몇 권 소개한다.

그 여름의 끝 / 이성복, 기억의 집 / 최승자, 사는기쁨 / 황동규, 가재미 / 문태준, 광휘의 속삭임 / 정현종

두두 / 오규원, 사라진 손바닥 / 나희덕,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 송찬호

작가의 이전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