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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May 09. 2023

조직바보들의 전쟁

동물행동학을 연구하시는 이화여대 최재천 석좌교수의 유튜브 '최재천의 아마존' 동영상을 보다가 '조직바보'라는 말을 듣고, 요즘 벌어지는 '간호법' 제정 논란 속에서 각 해당 조직들이 펼치는 홍보전략과 들어맞는듯하여 유심히 보게 된다.


'간호법'이 제정되어 어느 조직이나 단체가 더 이득을 보고 손해를 보거나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 그들 조직이 펼치는 각각의 논리와 주장만을 들여다보자.


최재천 교수는 "본인이 소속되어 있는 조직에 지나치게 충성하게 되면 조직이 전체적으로 하고 있는 일이 잘못되더라도 그 안에 속해 있으면서 그 조직이 원하는 방향으로 행동하게 된다"라고 '조직바보'를 규정하고 있다.


집단의 범주화 속에서 벌어지는 편견과 고정관념의 틀에서 개인이 벗어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내가 소속되어 있지 않은 어떤 조직이나 집단에서 누군가가 잘못하면 그 조직이나 집단을 매도하지만, 자신이 속한 단체에서 누군가가 잘못을 저지르면 개인의 잘못으로 몰아간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외집단 동질성(out-group homogeneity)과 내집단 편향(in-group bias)이라고 한다. 


어렵게 생각할 것도 없다. 나와 가치관이 틀린 단체나 조직에서 하는 주장이나 행동들이 모두 눈에 가시처럼 비친다. 정치적, 지역적 집단으로 가면 그 명암은 더욱 분명해진다. 태극기부대의 주장이 한심해 보이고 운동권조직의 위선이 가소로워 보인다. 중도가 옅어지고 사라진 듯하다.


세상은 하나가 사라지고 새롭게 전혀 다른 또 하나가 등장하는 시스템이 아니다. 물에 물감이 섞이고 배어들듯 그렇게 융합되어 가도록 되어 있다. 바로 진화다. 진화는 더 나은 쪽으로 가는 방향성을 갖지 않는다. 당시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하는 쪽으로 흘러갈 뿐이다. 인간의 기도와 식도가 목구멍이라는 하나의 통로를 활용하면서 기도가 앞쪽에, 식도가 뒤쪽에 위치하도록 진화했다. 얼마나 비효율적인 진화인가 말이다. 차라리 각각의 통로를 마련했더라면 식사하다가 싸리 들리는 일은 없을 것이고 기도를 덮는 후두개 없이도 계속 음식물을 먹을 수 있어 효율적일 텐데 그렇게 진화하지 않았다. 정교하다고 자랑하는 눈은 또 어떤가? 망막의 시신경을 한 곳으로 모아 뇌의 시각처리 영역으로 보내는 곳이 맹점인데 이곳에는 시세포가 없어 상이 맺히지 않는다. 이곳에 맺혀야 할 이미지는 뇌가 주변 이미지를 참조하여 채워 넣는 것이다. 시신경이 발달한 두족류처럼 시신경이 모이는 점이 망막 바깥에 있으면 더 선명하고 정확하게 사물을 인지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을 주장했던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무지는 용서받을 수 있다. 그러나 무사유는 죄악이다"라고 했다. 수많은 학살을 자행한 나치의 아이히만도 개인적으로는 매우 평범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지 않으면 부당한 권위에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그 권위에 동조되어 언제든지 악을 저지를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악의 평범성'이다.


'악의 평범성'이 개인에서 조직으로 확대되어 움직이면 '조직 바보'가 된다.


하지만 개인도 '악의 평범성'에서 벗어나기 어려운데 내집단 편향으로 뭉쳐진 조직에서 이견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곧 배신을 의미하는 일이고 왕따를 자초하는 일로 인식하게 된다. 조직의 살고 죽음이 달려있는 듯 달려들고 외길로 몰려간다. 조직의 사활이 걸렸다고 최면을 건다. 조직의 주도권을 빼앗기고 기득권을 침해받는다고 생각한다. 여기까지 오면 해결의 실마리는 꼬일 대로 꼬여버린다. 더구나 토론문화가 상실된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서로의 이견과 주장을 쏟아내고 설득하고 이해시키는 과정이 사라져 버렸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팽배한 상태에서 토론의 장은 어불성설이 된다. 본질은 사라지고 여론을 끌고 가기 위해 일단 머리띠 두르고 피켓 만들어 들고 온갖 언론 매체에 자기 조직의 주장이 담긴 성명서가 난무한다. 하다 하다 안되니 이 지경까지 왔겠지만 이 지경까지 오게 만든 원인에 대해서는 들여다보지 않으려 한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본질은 사라지고 곁다리 논리를 가지고 싸움을 벌이게 된다. 


개인이든 조직이든 주체적인 판단과 함께 옳고 그름을 구분할 줄 아는 것이 지혜다. 조직에서 개인은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는 영원한 물음일 수 있다. 모든 개인이 조직에서 휘슬 블로어(whistle blower) 일 수 있지만 휘슬을 불지 않아도 되게 하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억눌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안 불어도 되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조직을 이끄는 수장에게 역할이 달렸다. 물론 수장을 보필하는 사람들의 판단능력도 함께 작동해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지만 끊임없이 그렇게 되도록 설득하고 토론하고 양보하고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 중의 하나가 손에 쥐었던 것을 놓는 일일 것이다. 자기 것이라 생각하는 것을 내놓을 때는 스스로 놓게 만들어야 한다. 빼앗듯 놓게 만들면 반드시 감정이 동반되어 싸움으로 번진다. 뺐지 않고, 빼앗기지 않는 지혜는 스스로 조금씩 양보하면 된다. 말은 좋지만 실행은 어렵다는 현실에 직면한다. 그렇더라도 시도하고 돌파해야 한다. 자기주장만 해서는 영원한 평행선을 걸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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