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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Jun 07. 2023

물어라. 묻지 않으면 답변을 얻을 수 없다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냥 물으면 된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지?"라고 그냥 질문을 던져보라.


묻지 않았기에 해답을 찾지 않았고 찾지 않았기에 오리무중 안갯속을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무엇을 물을지조차 묻지 않고 산 것은 아닌지 뒤돌아볼 일이다.


물음에도 앎이 필요하다. 무엇을 물을지는 앎의 질에서 나온다. 기억의 저편에 연결 고리들이 묻혀있어야 한다. 그래야 낚싯바늘에 물고기가 걸리듯 물음에 대한 답변들을 낚아 올릴 수 있다. 물음에 대한 실마리들을 평소에 가져 본 적이 없으면 물음은 그냥 허공을 지나는 바람에 진배없다. 스쳐 지나가도 그것이 바람인지 모른다. 나의 땀을 식혀줄 바람인지조차 모른다.


과거의 기억을 풍부하게 갖고 있는 사람만이 떠올릴 추억도 많은 법이다. 세상에 대한 질문도 마찬가지다. 기억의 창고에 끄집어낼 수 있는 재료들이 쌓여 있어야 한다. 텅 빈 창고에서 금은보화와 쌀가마니가 나올 리 없다. 기억의 창고에도 지식과 경험을 계속 쌓아놓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 달에 책은 몇 권이나 읽는가? 그것도 아무 책이나 손에 집히는 대로 읽은 개수가 아니고 내가 던진 질문에 맞는 책들을 찾아 읽은 권 수 가 몇 개나 되는가 말이다. 아마 학교졸업하고 읽은 책 수를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일 사람이 태반일 테다. 그나마 손가락으로 꼽은 책들조차 베스트셀러라고 하니 마지못해 읽었던 것이 전부일테다.


사실 책은 지식의 대명사일 뿐이다. 도구일 뿐이다. 종이의 형태가 아니고 온라인을 통해 취식하는 수많은 정보들 또한 지식 전달의 유형으로 자리매김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굳이 형태의 종류를 놓고 읽었네 안 읽었네 무식하네 유식하네를 따진다는 것 자체가 유치해질 수 있다.


"1년에 책 한 권 안 읽어도 잘 살고 있는데, 사는데 전혀 지장이 없는데 뭔 소리 하는 건가?"


그렇다. 책 한 권 안 읽어도 먹고사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다. 지금까지 살아온 루틴대로 지내보건대 책은 쌀을 주지도 집을 지어주지도 않았다. 루비통이나 샤넬 가방과 맞바꿀 수 있는 교환가치를 지닌 것도 아니다.


그래서 묻지 않는 거다.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기에 물을 필요가 없었던 거다. 지금 편안한데 물을 필요가 없다. 지금 나를 더 돋보이게 하는 것은 손에 들고 있는 커다란 로고의 루비통 가방이고 손목에 차고 있는 파텍필립 시계만 보인다. 물질적으로 조금 풍요로워지면 생각이 단순해진다. 쫒는 지향점이 뻔해진다. 애써 물으려 하지 않는다. 겉이 화려하니 자기 존재도 화려한 줄 안다. 그것이 착각임에도, 얕은 포장임에도, 돋보이게 하는 치장은 끝없이 몰려간다. 


격이 등장한다. 졸부인지 아닌지, 진정한 부자인지 아닌지 보면 안다. 아무리 명품으로 휘감아도 천박함을 돋보이게 하는 도구로 기능하면 오히려 사람을 더 초라하게 만든다. 파텍필립이 아무에게나 자기의 시계를 팔지 않는 이유다. 돈 많다고 살 수 있는 품목이 아니라는 것이다.


명품은, 명품을 소장하고 소지했을 때 그 사람의 존재를 더욱 드러내고 돋보이게 하는 소품이다. 지식의 앎으로 내면을 채운 사람이 들었을 때 진정한 아우라로 상승효과를 나타낸다. 지금 명품 소비는 자신의 지적 천박함을 가리기 위한 소품으로 전락한 느낌이다. 명품이 많이 팔리면 팔릴수록 천박함이 만연돼 있는 것과 상관관계를 갖는 것은 아닌지 의심을 지울 수가 없다.


그래서 물어야 한다. 나는 지금 무엇을 모르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더 나아가 죽음은 나에게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북한산과 도봉산은 왜 바위산이지? 내가 호흡하는 이 공기 중에 산소는 언제부터 존재하고 있던 것이지? 시간이란 무엇이지?를 물어야 한다. 이 질문들이 나의 삶의 방향을 정하고 사회와 세상을 보는 시각을 만든다. 질문을 잘 던져야 질문에 대한 답변을 찾아갈 수 있다. 질문은 구체적이어야 한다. 질문이 삐딱하거나 호전적이면 거기에 맞는 해답을 찾게 된다. 묻는 질문에 따라 행동의 방향이 정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질문도 알아야 할 수 있다. 질문이란 궁금증이다. 어떤 팩트에 대한 인과관계와 상관관계를 찾아 앞뒤를 알고자 함이다. 알아야 이해할 수 있고 그래야 삶의 경우의 수를 더 많이 만나 자기 인생의 방향에 영향을 줄 수 있게 된다. 바로 질문은 행동이다. 움직임의 의식적 물음이다. 물음은 존재를 존재이게 하는 시작이다.


무엇을 물을지 생각해 보자. 아무 생각 없다고? 아이고 참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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